3월, 2022의 게시물 표시

우리의 뿌리를 찾아서 (1) - 요하 홍산 신석기 아저씨들은 단군 할배가 아니었습니다.

  간간히 집단유전학 논문을 올리는 레이블로 '우리의 뿌리를 찾아서' 제목을 론칭합니다. 손에 잡히는 관련 논문을 올리는 용도로 사용예정. Y Zhang et al. (2017) - Genetic diversity of two Neolithic populations provides evidence of farming expansions in North China,  J Hum Genet 요하와 황하는 둘 다 동아시아 농경 개시점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요하는 조를, 황하는 기장을 작물화한 것으로 생각됨. 그 이후로 신석기 시간 동안 요하와 황하는 각자 알아서 살았음. 그럼 황하와 요하 사이에 위치한 상간하( 桑干河) 지역은 어디 출신 사람들이 살고 있었나가 이 논문의 주안점이 되겠음. 그 중 Jiangjialiang( 蔣家梁)은 기원전 3천년대 이전의 유적이고 Sanguan(三官)은 약 기원전 1500년대 유적임. 위는 말 많은 요하 지역 문화 : 홍산 - 소하연 - 하가점 하층 - 하가점 상층/북방 유목 문화 아래는 동시기 황하 지역 문화 : 앙소 - 이리두 - 서주(西周) 논문에 사용한 고인골이 어느 시기 사람인지 대강 감을 잡기 바람.  Jiangjialiang( 蔣家梁)은 기원전 3천년대 이전의 유적이므로 요하 홍산 문화에 해당하며 Sanguan(三官)은 약 기원전 1500년대 유적이니 하가점 하층 문화에 해당하는 것. 모계를 추적할 수 있는 mtDNA(미토콘드리아DNA) 하플로그룹을 분석했더니 다소간의 등락은 있어도 배합비율은 지역이나 시기에 상관없이 비슷비슷함. 외부에서 여성이 다수 이주해 온 흔적이 없다는 의미임. 부계를 추적할 수 있는 Y 염색체 하플로그룹을 분석한 결과 상간하 유역은 기원전 3천년대는 요하와 패턴이 유사하지만 (다수의 N 타입) 기원전 1500년대에는 O3 타입 남성만이 확인 됨. 요하 지역은 홍산 문화 때부터 N 타입이 우세하나 하가점 하층 문화때부터 점차 O타입이 유입되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됨. ...

알타이제어 논쟁의 종말 (1)

  알렉산더 보빈 교수라는 분이 Central Asiatic Language라는 저널에 2005년 기고한 "The end of the Altaic controversy" 논문 번역 내용입니다. 제가 전공자도 아니고 영어도 특출나지 않은지라 오역이 난무할 것입니다만, 현재 알타이제어의 상황 인식에 일말의 도움이 되지 않을까해서 틈틈이 번역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꾸벅. 나는 이 논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다소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지난 10년간 알타이 제어 논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이 글을 더 읽었을 때 충격을 받지 않았으면 한다. 나의 학문적인 경력은 알타이 가설을 지지하는 것으로 시작하였지만, 최근 4년 동안 나의 생각은 그 가설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하지만 꾸준히 변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의 변화는 매우 많은 원인에 의한 것으로,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만 언급하도록 하겠다. 첫째, Stefan Georg의 훌륭한 논문은 내가 Manaster Ramer와 Sidwell과 함께 저술한 1998년 논문에서 주장한 알타이 제어의 타당성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그리고 훌륭하게 비판하여 여러 면에서 내 눈을 뜨게 해 주었다. 2000년 가을 처음 Georg를 만난 것은 내 연구 방향의 전환점이 되었고, 그 이후로 독일, 일본, 터키에서 이어진 우리의 만남과 토론은 더할 나위 없는 큰 소득이었다. 그가 나와 함께한 수년 동안에 걸친 인내심있는 토론 덕택에 나는 투르크어와 몽골어의 구조와 데이터에 대해서 더 나은 이해를 하게 되었으며 이 논문에서 앞으로 보여주게 될 방법론과 데이터 역시 친구이자 동료인 Georg에게 학문적으로 매우 큰 빚을 지고 있다. 두번째로, 나의 알타이 제어에 대한 학문적인 지식은 점진적으로 향상되었다고 믿는다. 이 믿음의 근거는 다양한 언어학적 사실과 데이터를 더 잘 이해하게 된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점차 나는 투르크어와 몽골어 데이터가 퉁구스어, 한국어, 일본어와 아무런 연관 관계를 보...

재가승은 과연 한반도 내 소수민족의 이름인가

  2. 在家僧의 언어  ‘在家僧’에 대해서는 민속학이나 불교사에서 주목해 왔다. 여진족의 후예라는 설 외에 그들의 특수한 신분, 거주 지역, 문화가 일반인들과 달랐기 때문에 그들의 언어도 특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으로 필자는 생각하였으나 아직 직접 조사할 기회는 얻지 못하였다. 필자가 본 재가승 관련 연구는 재가승의 유래와 그 민속에 대해 논의한 황철산(1960),이강렬(1985)이다.33) 이들 연구에는 민속과 관련된 재가승의 언어가 수록되어 있는데 필자가 조사한 함북방언과 별 차이가 없다. 황철산(1960)은 재가승의 유래에 대한 제설을 비판하면서 그들이 여진족의 후예거나 그들과 관련된 사람들일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재가승이 일반인들과 어울려 살기 시작한 것은 대략 일제강점기부터이므로 만약 그들의 언어가 일반인들의 언어와 달랐다면, 함북방언과 다른 특이점이 나타났을 것이나 그러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황철산(1960)은 재가승의 민속과 관련된 아래 (3)의 몇 단어를 여진어와 관련짓고 있다.  (3) 쓸(갈래, 편) - 만주어 silba(同姓). cf. 나그네쓸/우리쓸(외지 사람/우리쪽 사람).  오로시(가죽신) - 우라화(烏拉靴)에서 유래.  도레기(가죽신: 오로시에 신 등(靴靿子)을 댄 것) - 만주어 투레(ture)  살궁(살강) - 만주어 사르후(sarhv)  주지춤, 주지놀음,  어베주지 - 만주어 주춘(jucun)  필자가 조사한 함북방언의 ‘쓸’은 ‘①여울[灘], ②형세나 판국, ③혓바늘’의 뜻을 갖는 동음이의어이다. 따라서 위 ‘쓸’은 더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오로시’와 ‘도레기(다로기)’는 小倉進平(1927), 이기문(1991), 곽충구(2006)에서도 그 어원에 관심을 둔 바 있으나 어원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위처럼 ‘오로시’를 ‘우라’와 관련짓는 것은 모음 대응에서 문제가 있다. ‘도레기(<도뢰기)’는...

훈민정음은 한자어 발음을 위해 창제되었을까.

  저는 본질적으로 훈민정음의 창제동기를 어제 서문에 제시되어 있는 틀 밖에서 찾아 보려고 하는 시도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그래서 세종대왕이 제시한 그 너머를 분석하는 것은 세종의 본성이나 당시의 시대정신에 다가가는 일이 아니라 불필요한 ad hoc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만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삐딱한 마음을 가지고 오로지 '훈민정음이 한자어 발음 표기를 위해 고안된 것'이라는 주장을 공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훈민정음(+동국정운)의 한자어 표기 체계가 당대 한자어 음 습득에 도움이 되긴 한가? 훈민정음(+동국정운)에서 제시한 한자어 표기 체계가 얼마 가지도 못해서 망한 이유 중 하나는 한국한자음 체계와 동떨어진 체계를 만드려고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한국한자음은 ㄱ/ㅋ-ㄷ/ㅌ-ㅂ/ㅍ의 2대립 구조인데 어거지로 중국어 전탁음(유성음) 출신 한자어는 일부러 병서하여 ㄲ, ㄸ, ㅃ를 쓰자고 하는 식인데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입성 -t가 한국한자음에서는 -l로 실현되는 것은 이영보래로 억지로 처리한다고 했지만 중국음 견모(見母)[k], 계모(溪母)[kʰ], 효모(曉母)[x], 갑모(匣母)[ɣ]의 한국한자음에서의 혼란 양상-이 4 음운이 규칙성 없이 ㄱ/(ㅋ)/ㅎ로 분산되어 정착한 양상-에는 손도 대지 못해서 쾌夬운을 제외하고는 ㅋ으로 시작하는 한자음을 설정하지도 못하고 이도저도 아닌 상태에서 두 손을 들어버렸습니다. 근데 이런 상태의 훈민정음이 한자어 습득을 위해서 탄생했다고요? 2. 그럼 당대 중국어 습득에는 도움이 되긴 한가? 그럼 일부러 불편함을 유발한 한자어 표기 방법이 당시 중국어의 원음을 추가로 반영해서 그런 것인가? 훈민정음의 체계는 당말-북송대에 성립된 36자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그에 대한 일괄적인 음운 정립을 시도한 것은 부정하지 않습니다. 근데 조선이 건국된 원명교체기의 중국어는 이미 중고한어의 시기를 지나 만다린 단계로 진입한 상태로 음운이 다 변화하여 훈민정음식 표기대로 읽으...

[번역] 티베트-버마어족의 분화와 기원에 대하여 (2)

  The Diversity of the Tibeto-Burman Language Family and the Linguistic Ancestry of Chinese George van Driem BULLETIN OF CHINESE LINGUISTICS 1.2:211-270, 2007 8. 언어학적인 조상과 물질 문화 언어고고학에서는 최초의 티베트-버마어 사용자 혹은 그 중의 일부가 수렵채집민이 아니라 농경민이었다고 제안하기 시작했다. 반면 동부 히말라야의 Limbu, Hohorung, Dumi, Kiranti 집단은 그들의 조상들이 한 때 수렵채집민이었으나 어느 날 농경민이 되었다는 전승을 가지고 있다. 정주 농경민 생활로의 전환은 분명 매우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이겠지만 마치 최근에 일어난 일인 것 마냥 생생한 전승으로 남아 있다. Kiranti의 조상은 원래 농경민이었으나 후에 주변 환경의 영향으로 다시 수렵채집 생활로 돌아갔다가 후대에 다시 정주 농경민이 된 것일까? 구전 전승의 실체를 밝히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조 Setaria italica 와 티베트-버마 문화 사이의 오래된 관계가 그것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황하 유역의 고대 중국어 稷tsi"k가 멀리 남서부 부탄의 Lhokpu어의 caʔkto ‘조’라는 어휘로 반사되는 것처럼 말이다. 조 Setaria italica 와 수수 Panicum miliaceum 는 오늘날에도 북중국의 주요 작물로 Peiligang 문화(6200-5000BC)부터 재배되어 왔다. 이보다 더 이른 시기(10000-6500BC)의 농경에 대한 증거는 광범위한 발굴에도 북중국이나 한반도에서 보고된 바 없다. 따라서 북중국의 초기 신석기 문화는 토기 제조의 등장으로 정의되며, 한국과 일본의 토기 문화 역시 농경의 지표로 해석되지 않는다. 동 네팔의 Kiranti 집단에서는 조로 만든 발효주와 증류주 없이는 종교 의식이 치뤄지지 않는다. 이는 조로 만든 술이 조상을 기념하고 숭배하는 의식에서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뿌리를 찾아서 (3) - 일본 야요이인의 고향은 한반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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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L Ding et al. (2011) - Mapping human genetic diversity on the Japanese Archipelago,   Sci Res 일본인은 신석기 조몬인과 청동기 도래 야요이인의 섞임으로 등장했다는 것은 학계에서 이미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학설입니다. 리뷰 논문과 함께 세부 내용을 설명드려 보지요. 본격 유전학 연구가 이루어지기 이전에도 일본열도의 신석기 조몬인과 청동기 야요이인이 별개의 인적집단일 것이라는 생각은 만연해 있었습니다. 고고학적으로 바라 보았을 때 경제 활동 양상이나 취락의 형태나 부장품 등등이 매우 달랐거든요. 이런 변화가 일본 열도 자체적인 변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야요이 문화의 개시 위치가 한반도와 가까운 북큐슈라는 점, 농경 문화, 금속 주조 문화 등이 일본 열도 내재적으로 발생했다고 볼 수 없는 점에서 야요이 문화는 외래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외래의 영향이 어떤 인구 이동에 의해서 촉발된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뒤따랐습니다. 이에 야요이인이 일본 열도 외부에서 들어와 기존 재지 조몬인을 완전히 밀어내면서 현재의 일본인이 되었다는 대체설, 정반대로 외부의 영향을 받아 야요이 문화가 개시되었지만 재지 조몬인들이 야요이 문화를 받아들이게 된 것일뿐 현재의 일본인은 조몬인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라는 변화설, 외래 야요이인이 재지 조몬인들과 뒤섞여 일본인이 되었다는 혼합설이 제시되었습니다. 이제 유전학적인 접근이 가능해졌으므로 실제 양상이 어떤지를 추척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계 계보를 파악할 수 있는 Y 염색체 하플로타입 비율을 확인했을 때 일본에서 많이 나타나는 하플로타입은 O3/O2 - D2 - C3/C1 순입니다. O3는 중국부터 한반도에 걸쳐 널리 확인되는 하플로이고 O2 하플로타입 중 O2b1-47z는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만 확인되는 하플로로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인적 구성에 상당한 공통 분모가 있다는 것을...

알타이제어 논쟁의 종말 (2)

  알렉산더 보빈 교수라는 분이  Central Asiatic Language 라는저널에  2005 년 기고한  "The end of theAltaic controversy"  논문 번역 내용 두번째입니다 .    셋째로 ,  비교언어학은 무 ( 無 ) 에 기반할 수 없다 .  언어는 그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의 문화와 사회 ,  정치가 버무려진 역사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언어 역시 그 자체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  그러나  EDAL 의 저자들은 그들이 비교하는 제 ( 諸 )  언어들의 역사를 존중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인다 .  어원연구에 대한 적당한 예를 앞으로 이야기하게 되겠지만 그 많은 농경과 유목 사회에 관련된 어휘들의 재구를 통해 어떻게 원 ( 原 )  알타이어가 지금으로부터  6 천년 이전에 존재했다는 주장과 연결되는지 모르겠다 .  쉽게 예를 들어보자 .  어느 언어학자가 고대 일본어의 칼과 관련된 단어를 다른 언어의 그것과 비교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먼저 고대일본에 어떤 칼이 존재했는지 ,  어떻게 생겼는지 ,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먼저 알아야 한다 .  그러나  EDAL 의 저자들은 그것을 모르고있음을 독자들은 곧 눈치챌 것이다 .  원 ( 原 )  알타이어  *g a ŕ [a]“ 날카로운 날 ’ 이 원 ( 原 )  일본어  katana “ 칼 ” 과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원 ( 原 )  만주 - 퉁구스어 대응 어휘  *gara “ 가지 ,  막대기 ” 의 어원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 EDAL 의 저자들은 고대 일본어  katana “ 검 ,  칼 ” 을  *kata-na 로 형태소 분석을 하고 있는 것이 ...

우리의 뿌리를 찾아서 (2) - 애신각라씨는 신라인의 후예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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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H Wei et al. (2017) - Genetic trail for the early migrations of Aisin Gioro, the imperial house of the Qing dynasty,   J Hum Genet. 이미 애신각라씨족의 Y 염색체 하플로타입은 연구가 되어 한국인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C3b1a3a*-M401(xF5483)이며, 애신각라 각창안 대부터 집안 형편이 펴진 것까지 이미 알려졌으나 부관참시용으로 추가적인 논문을 소개함. 아이신교로(애신각라) 일족에서 부계로만 전달되는 Y 염색체의 염기서열을 분석하여 모두 C3b1a3a2a에 속하는 것을 확인. 칭기즈칸 하플로타입이라는 이명으로 불리는 C3*-star cluster( C3b1a3a1) 의 (별명이 칭기즈칸 하플로타입이지 정말 칭기즈칸의 하플로타입이 C3*-star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음)  자매집단인 C3b1a3a2의 후예집단임을 도표에서 확인할 수 있음.  C3b1a3a1은 몽골어 사용자의 주요 하플로타입이고, 같은  C3b1a3a2의 후예가  다우르족, 부리야트족에도 나타나므로 이를 한데 묶어 C3b다우르 clan으로 명명 즉 C3b몽골-C3b다우르 공통 부계 집단에서 C3b몽골과 C3b다우르 집단이 분가하고, 다시 C3b다우르 집단에서 애신각라씨, 다우르족 등등이 분리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음. 다우르족은 러시아의 침입 이전에 아무르강 북쪽 지역에서 살았던 것으로 생각되므로 애신각라 조상도 원래는 아무르강 북쪽에서 살았을 것. 전설적인 선조 부쿠리 용손 대에 남하를 시작하여 오도리 부족 두두 먼터무 -> 두만강 하류 건주여진 단계를 거쳐 누르하치대에 이르름. 그러니까  애신각라씨가 신라를 생각할 이유가 없다 . 그리고 계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애신각라씨 조상은 원래 몽골어 사용자로 생각되므로 퉁구스어 사용자 집단에 굴러들어온 근본 없는 집안임.(퉁구스어 집단의 우세 하플로타입은...

아프리카아시아 어족에 대한 잡다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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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아시아 어족(Afroasiatic languages)은 거대한 어족 집단으로 북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의 뿔(에디오피아 고원-소말리아 반도), 레반트, 아라비아 일대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를 통칭합니다. 많은 언어들이 근현대 시기에 들어서서야 문자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에 비해 아프리카아시아 어족은 초기부터 문자 생활을 한 고대 이집트어, 아카드어, 가나안어(페니키아어, 히브리어), 아람어 등 덕분에 비교적 고대의 언어 자료도 풍부한 편입니다. 잘 알려진 어족 집단인 인도-유럽어족과 한장어족의 분화시기 추정이 기원전 4500년 전, 기원전 2000년 전 내외로 생각되는 반면 아프로아시아어족의 분화시기는 후기 구석기인 1만 6천년에서 신석기 초기인 1만 2천년 전까지로 잡습니다. 언어의 분화 정도나 어휘 보존 정도 등의 증거를 토대로 각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이겠습니다만 고대 이집트어와 셈어군 언어(특히 아카드어) 사이의 분화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아시아어족은 오모트어 집단을 제외한다면 크게 베르베르어군, 차드어군, 쿠시어군, 셈어군, 고대이집트어군으로 나뉘어지는데 고대 이집트어는 쿠시어군의 영향을 약간 받긴 했지만 그래도 셈어군과 가장 가깝다고 여겨집니다. 고대 이집트어를 기록한 신성문자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이미 고대 이집트어가 이집트 지역에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매우 당연합니다. 상이집트나 하이집트의 물질문명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 기원전 6천년 전 즈음의 Fayum A 문화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데 이 집단은 사냥이나 물고기 잡이에 용이한 Qarun 호수 근처에 자리잡은 사람들로 그 중에서 Kum W라는 곳이 가장 높은 위계를 나타내는 지역입니다. 그냥 수렵 채집만 해도 꽤나 풍족하게 살만한 곳이었지만 이 사람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져온 작물을 이용한 농경과 가축 사육을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가나안 지방을 거쳐 온 작물이라 이집트의 환경과 그다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생각보다 생산량은 높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