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티베트-버마어족의 분화와 기원에 대하여 (2)
The Diversity of the Tibeto-Burman Language Family and the Linguistic Ancestry of Chinese
George van Driem
BULLETIN OF CHINESE LINGUISTICS 1.2:211-270, 2007
8. 언어학적인 조상과 물질 문화
언어고고학에서는 최초의 티베트-버마어 사용자 혹은 그 중의 일부가 수렵채집민이 아니라 농경민이었다고 제안하기 시작했다. 반면 동부 히말라야의 Limbu, Hohorung, Dumi, Kiranti 집단은 그들의 조상들이 한 때 수렵채집민이었으나 어느 날 농경민이 되었다는 전승을 가지고 있다. 정주 농경민 생활로의 전환은 분명 매우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이겠지만 마치 최근에 일어난 일인 것 마냥 생생한 전승으로 남아 있다. Kiranti의 조상은 원래 농경민이었으나 후에 주변 환경의 영향으로 다시 수렵채집 생활로 돌아갔다가 후대에 다시 정주 농경민이 된 것일까? 구전 전승의 실체를 밝히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조Setaria italica와 티베트-버마 문화 사이의 오래된 관계가 그것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황하 유역의 고대 중국어 稷tsi"k가 멀리 남서부 부탄의 Lhokpu어의 caʔkto ‘조’라는 어휘로 반사되는 것처럼 말이다.
조Setaria italica와 수수Panicum miliaceum는 오늘날에도 북중국의 주요 작물로 Peiligang 문화(6200-5000BC)부터 재배되어 왔다. 이보다 더 이른 시기(10000-6500BC)의 농경에 대한 증거는 광범위한 발굴에도 북중국이나 한반도에서 보고된 바 없다. 따라서 북중국의 초기 신석기 문화는 토기 제조의 등장으로 정의되며, 한국과 일본의 토기 문화 역시 농경의 지표로 해석되지 않는다.
동 네팔의 Kiranti 집단에서는 조로 만든 발효주와 증류주 없이는 종교 의식이 치뤄지지 않는다. 이는 조로 만든 술이 조상을 기념하고 숭배하는 의식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팔에서 조와 수수는 Eleusine coracana라는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품종으로 대체되곤 한다. 그러나 부탄이나 네팔의 일부지역에서는 아직도 조와 수수가 널리 재배되고 있다. 예를 들어, 부탄의 Gongduk 집단에서는 부족의 제사용으로 조와 수수를 중요하게 키우고 있다.
히말라야는 아리아 종교나 힌두 문화, 티벳 고원으로부터의 불교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동 네팔의 Kiranti나 동 부탄의 Gongduk처럼 전통적인 티베트-버마 문화를 간직하는 집단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오래된 무속 신앙을 유지하는 곳에서는 조와 수수로 만든 술이 그 의식의 중심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다. 나는 상나라와 주나라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술을 채운 청동잔을 들어 올리던 Kiranti 사람의 눈을 떠올리게 된다. 그 들이 사용하는 다양하고 화려한 술잔들은 고고학자들이 분류한 觚, 壺, 尊, 銧, 杯 등등과 닮아 있다. Kiranti, Gongduk, 중국의 옛 선조들은 신성한 술을 저장하고, 섞고 빚는데 이 그릇들을 사용했을 것이다.
자, 수수와 조가 처음 북 중국에서 재배되었고, 그 작물화 시점이 6200bc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작물화의 장소가 섬서성에서 동 히말라야 사이의 어딘가이고, 이 작물이 여전히 티베트-버마 인들에게 재배되고 있다는 것이 뭐 어떻단 말인가? Lhokpu인들은 초기 황하 유역의 농경민들이 티베트 고원을 지나 히말라야를 넘어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Daur 서부까지 경작지를 찾아 이주한 이주민의 후예인 것일까? 아니면 거꾸로 Brahmaputran의 정글에서 출발한 고대 중국인들이 히말라야를 넘어 비옥한 북중국 평원으로 길고 긴 여정을 지난 것인가? 우리고 고분을 발굴하기 이전에 우리는 먼저 최초의 작물 재배가 언어 확산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따져봐야 한다. 신석기 시대는 매우 긴 시간이며 그 동안 인구수는 오르락내리락 했을 것이다. 이에 최초의 농경인들이 사용한 언어가 후세에 전혀 이어지지 못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농경은 문화-언어적으로 전혀 관련없는 집단에 수용되었고, 농경 문화는 언어나 문화 장벽에 별다른 방해 없이 쉽게 전파되어 나갔다. 수메르인, 엘람인, 아카드인, 후리(Hurrian)인, 하티(Hattic)인, 그리고 그 외 수많은 동시대의 농경 문명인들은 그 지역의 최초 농경인도 아니었고, 이들 고대 언어들은 후대에 이어지지도 못했다. 최초의 기록과 그로부터 재구되는 근동의 역사에서 우리는 농경과 작물의 보급이 언어 장벽을 뛰어 넘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소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의 청동기 시대는 농경 수확물로 유지되는 풍요로운 도시를 노리고 아나톨리아와 비옥한 초승달 지대로 몰려드는 급격한 민족 집단의 이동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Guti인, 아모리인, Kassite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약속된 풍요로운 삶에 이끌려 들어왔다.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히타이트인과 Mitan인 역시 비슷하게 아나톨리아와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정착하게 되었다. 지명학적 증거와 몇몇 신에 대한 숭배 의식 연구 결과 수메르인 역시 북부에서 저지(低地) 메소포타미아로 이주해 왔으며 거기서 재지 원주민들로부터 농경을 배웠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런 유사한 일이 황하 유역에서 일어나지 말았으리라는 법은 없다. 고대 언어 재구를 통한 고대의 기록과 집단 유전학 연구로 얻은 복잡한 양상 사이의 의미 있는 유사성은 실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우리에게 여러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고고학, 비교 언어학, 집단 유전학은 선사시대에 대한 서로 다른 세 가지 정보이며 교과서이다. 비슷한 관점에서 Krafet은 과거에 설명했던 것보다 더 복잡한 다방향의 생물학적, 문화적 다층구조를 이해함으로써 다층적이고, 다방향적인 종합적인 틀을 통해 동아시아의 인구 집단 구조가 만들어지는 기층 구조에 대해 더 사실에 가까운 모델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문화적인 형질이나 작물, 작물의 이름은 발화자 집단을 따라 이동할 수 있지만, 언어 장벽을 넘어 확산되거나 새로이 이주해 온 신참자들이 재지 원주민들로부터 배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은 고고학적인 기록으로 증명된 것처럼 신석기 농경과 관련된 유전자나 언어 확장을 기계적으로 대응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고고학이 선사시대의 물질문화에 대해서 말해 주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인구이동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고대인들이 선호한 지역의 중심부가 어떤 점에서 주변부에 비해 사회-경제적인 차이가 있는지이다. 주요 티베트-버마어 군 집단의 분포는 사천과 동 히말라야의 비옥한 구릉과 계곡에 존재하던 티베트-버마어족 중심지에서 북중국 평원지역으로 고대 중국어 사용자가 이동해 갔음을 보여준다.
티베트-버마어 사용자들의 최신 지역 분포는 여러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앞으로 다루게 될 이 선사시대의 재구성 그림에 대해 각기 시나리오 1, 2, 3이라는 번호를 매기도록 하겠다. 시나리오 2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세부적인 형태가 있으므로 이를 2a, 2b, 2c라고 이름 붙이겠다. 지난날 본 저자는 시나리오 1과 2b, 2c에 해당하는 사례를 다룬 바 있으며 시나리오 2a는 Paul Benedict에 의해 최초로 제안되었고, 시나리오 3은 Peter Bellwood가 모델을 만들었다.
시나리오 1에서는 원(原) 티베트-버마어가 현재의 사천성 지역에서 기원하였으며 초기 티베트-버마어 사용자가 남서쪽 Brahmaputran 평원으로 확장해 나가 동인도의 오스트로아시아 사용자 신석기 문화와 접촉한 것으로 추측한다. 또 다른 집단을 원 중국-Bodo인으로 지칭한다면 이 집단은 북동쪽으로 이동해 황하 유역의 배이강(Peiligang)문화 (6500-5800BC), 자산(Cishan)문화 (6000-5600BC), 대지만(Dadiwan)문화(6500-5200BC)와 같은 신석기 문화를 만들어 내었다. 다른 집단은 사천에 남아 있다가 남쪽의 운남성의 비옥한 구릉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마가요(Majiayao) 신석기 문화(3900-1700BC)는 대지만 문화 다음에 등장하는 문화로 감숙성 동쪽과 주변의 청해성, 닝샤 후이족 자치구 지역에 존재했었다. 동쪽에 남아 있던 중국계 집단은 앙소(Yangshao)문화(5500-2700BC)-배이강 문화와 자산 문화를 계승했다-와 연관된다. 반면 히말라야 방향으로 확장해 나간 Bodo인은 동티베트의 mKhar-ro와 카슈미르의 Burzahom에 나타났던 마가요 신석기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동시기의 감숙성의 원 거주지는 마가요 문화의 마가요 기(期)(2700-2300 BC)와 반산(Banshan) 기(2200-1900BC) 사이에 있었던 기후 변화로 쇠퇴하였다. 이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본 저자가 몇 차례에 걸쳐서 언급한 바 있다.
다른 논문에서도 다룬 바 있는 시나리오 2에서는 완전히 다른 시간 범위를 설정한다. 이 관점에서는 고대 티베트-버마인이 초기 신석기 시대 문화를 영위한 배이강, 자산, 대지만 지역에서 있었던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고대 티베트-버마인은 황하 유역의 풍요로움에 이끌려 자신들의 원 거주지에서 이탈해 온 것으로 신석기 시대 말이나 청동기 시절에 황하 유역에 침투해 그들의 언어를 전파한 사람들이다. 이 시나리오의 출발점 역시 사천성이다
우리가 시나리오 2a로 부르기로 한 형태는 Benedict에 의해 처음 제안되었는데 상나라는 중국어 사용집단이 아니었을 수 있다. 서쪽에서 온 주나라가 티베트-버마어를 사용하지 않던 상나라 주민들과 합쳐지거나 침투하면서 최초의 원 중국어가 탄생했다. 이 가설에 대한 나만의 변이 모델인 시나리오 2b에서는 상나라 시기 이전의 중국어계, 혹은 중국어-보도어 계열의 선조가 풍요로운 황하 강 유역의 농경 문화에 이끌려 왔다고 가정한다. 시나리오 2c는 티베트-버마어의 황하 강 유역으로의 도입 혹은 재도입이 선사시대에 여러 번에 걸쳐 있었다는 것이다. 시나리오 2에 대한 여러 형태는 황하 유역의 기술적으로 발달한 사회의 존재가 부와 선진적인 문물, 약탈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주에 대한 동기를 부여했다고 생각한다.
시나리오 2에서 제안된 언어 침투 모델과 부합하는 청동기 고고학 증거들이 있다. 중국 동부와 비교하여 남서부 지역은 고고학자들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했었다. 다행스럽게도 Zhang Guangzhi가 사천성 지역의 발굴이 없다는 것을 한탄한 덕분에 몇몇 발굴이 이루어 졌다. 동시기에 민강 유역을 비롯한 사천성 전역이 고속도로, 댐, 산업 시설 건설 덕분에 파헤쳐 졌고, 고고학적 가치를 가진 많은 지역, 특히나 고대인이 주로 살았을 강 주변 지역이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삼성퇴(Sanxingdui)와 같은 주요한 청동기 문명이 발굴을 통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은 1986년이 되어서였고, 양자강 지류인 민강 상류의 급류 지역을 따라 최근 더 이른 시기의 초기 신석기 문화가 발견되었다. 성도 동북쪽의 삼성퇴 유적보다 더 이른시기의 것으로 파악된 파서(Boxi) (4000BC), 영반산(Yingpanshan) (3500-3000BC), 사오도(Shawudu) 문화가 성도에서 gzi-rtsa sde-dgu (구채구, Jiuzhaigou)를 잇는 길 위에 존재하는 민강의 주변부 평원 중 가장 큰 지역인 무현(Maoxian)현에서 발견되었다.
삼성퇴는 고대의 촉(蜀)과 관련될 것으로 생각된다. 연대를 나누자면 최초의 정착기인 1기는 보돈(Baodun)기라고 명명 되었는데 2800-2000BC 사이 동안 지속되었으며 동시기 민강 상류에는 사오도 문화가 있었다. 삼성퇴 문화의 특징적인 청동기 문화 양상은 2기와 3기에 두드러지는데 기원전 2000 년에서 1200년 사이에 존재했다. 그러므로 삼성퇴 문화의 절정기는 안양의 상나라 (1700-1100BC)와도 다소 겹치는 시기이다. 후기 파촉(Bashu)기 (1200-800BC)는 서안 근처에 있었던 호경(鎬京)을 중심으로 한 서주(1100-771BC) 시기와 동시기이다. 안양에서 발굴된 후기 상나라의 용과 인상학적 모티프가 새겨진 청동 동발鐃과 접시盤는 실제로 사천의 초기 삼성퇴의 도상학적 인상을 연상시킨다.
삼성퇴 문화의 놀라운 형상은 고고학자들이 그 사회를 사실상의 희생제의가 중심이 된 신정국가로 추측하게 하였다. 발효주와 증류주의 양조가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정교한 청동기 그릇과 악기, 다양한 물동이와 더불어 삼성퇴 사람들은 동쪽의 상나라와 주나라 사람들이 그랬듯이 다양한 종류의 발효주, 증류주용 식기를 가지고 있었다. 고고학적인 상상은 술과 도깨비 같은 모습의 신에게 바치는 희생 제의가 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 광경이 마치 다른 티베트-버마인들의 문화에서 나타나는 의식에서 술이 가지는 중요성이나 Kiranti인이나 다른 히말라야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피 공양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삼성퇴는 많은 장식용 청동 장식품과 도구를 만들었지만 옥으로 만든 무기도 다수 만들었다. 홀璋, 단도戈, 손도끼, 칼, 검, 창이 다양한 옥 끌과 다른 석기 물건과 함께 출토되었다. 티베트-버마인의 섬서성으로의 확장은 평화적이기보다는 군사적인 활동의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중국으로의 티베트-버마어의 침투의 전조를 알린 장군의 이름은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못했지만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비슷한 침공을 했던 Guti인, 아모리인, Kassite인보다는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다. 말 그대로 이 침투의 유산은 중국어라는 티베트-버마어의 한 가지로 남아 있다. 모택동의 홍군이 1935-36년에 증명한 것처럼 사천성과 티베트 고원 동쪽 기슭의 험준한 지형은 섬서성으로의 군사적 작전을 펼치는데 전략적으로 중요한 근거지이다. 물론 홍군의 사례는 패색이 짙은 많은 병사들이 도망쳐 쉴 수 있는 근거지를 이야기한 것이지만.
Benedict가 제안한 것처럼 중국어가 섬서성에 들어오게 된 것이 주나라 때로 늦춰진다 하더라도 기원전 2천년대부터 지금까지 수도의 이전 때문에 발생하는 중심 방언의 변화와 한나라의 팽창과 같은 격렬한 문화 변천과 군사 활동은 재구된 고대 중국어와 현대 중국어 사이의 비정상적인 괴리를 낳기에 충분하다. 중심 방언의 경우 주변부의 고립된 지역의 언어보다 더 빨리 변하는 경향이 있다. 티베트-버마어의 한 일파가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체로 남을 정치적 중심에 도입되고 난 이후 이 언어는 다른 오지의 티베트-버마어 일파보다 더 빠르게 변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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