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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에도 관심을 - 가야연구 맛보기 (7) : 구야국의 초기 발전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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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임의로 구야국의 건국을 김해에서 목관묘가 목곽묘로 전환되는 시점으로 잡고 김해의 물질 문화가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간략히 짚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목곽묘 전환기에 김해의 묘제 형식은 상당히 많은 변화가 일어났지만 부장되는 토기 형태는 과거 목관묘 단계의 고식와질토기를 계승한 신식와질토기가 생겨나게 됩니다. 묘제 형식 변화 폭이 더 작은 다른 영남지방에서도 신식와질토기가 생산되기 시작하며 약간의 지역적인 차이를 제외하고서는 비슷한 형태의 신식와질토기가 각지에서 생산됩니다. 하지만 고식와질토기가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정도보다 신식와질토기의 변화 속도가 빠르고 그 형태 변화 정도가 더 큰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외부와의 교역 폭이 넓어지고 그 수용하는 속도도 빨라졌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1) 신식와질토기의 형태적인 변화는 전단계 조합우각형파수부호(소뿔모양의 손잡이를 따로 붙인 토기)에서 손잡이가 사라지고 받침(대부)이 생긴 대부광구호로 변했다가 위로 넓게 벌어진 아가리가 일자형태의 대부직구호로 변하고 점차 목이 짧아져 단경호 순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 중에서 김해지역의 신식와질토기는 대부직구호 단계가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아마도 빠른 도질토기 생산이 가능해졌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2) 덧붙여 울산지역은 고식와질토기와 신식와질토기 사이에 문화적인 단절이 있었다고 볼 여지가 있는데, 이는 외부 집단의 정착을 상상하게 합니다. 이 시기 울산지역 고분군이 경주를 압도하고 경주지역에 석씨 계열의 고분군이 구전되지 않는 것을 통해 석탈해 집단이 울산지방에 정착했을 것이라는 가설도 있지요.(3) 김해 특이적인 외절구연고배의 전신이 되는 고배도 신식와질토기 단계에서 등장하며 점차 영남 공통 양식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걷게 됩니다.(4) 마침내 신식와질토기 단계를 종료하고 도질토기 단계가 3세기 후반 대성동 29호분 시기부터 시작됩니다. 이로써 구야국(가락국)이 주변 지역보다 앞서 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

한국어와 일본어는 얼마나 유사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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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sciencemag.org/content/300/5619/597.full.pdf Around 400 B.C., intensive rice agriculture, new pottery styles, and new tools, all based on Korean models, appeared  on the southwestmost Japanese island of Kyushu near Korea and spread northeast up the Japanese archipelago. Genes and skeletons of the modern Japanese suggest that they arose as a hybrid population between arriving Korean  rice farmers and a prior Japanese population similar to the modern Ainu and responsible for Japan’s earlier Jomon pottery. Modern southwest-to-northeast gene clines in Japan and DNA extracted from ancient skeletons support this interpretation (59, 60). (기원전 400년 경, 모두 한국에서 기원한 집약적인 쌀 농경법과 새로운 토기 형태, 새로운 도구가 한국에서 제일 가까운 큐슈 서남단에 들장했고 일본열도의 북동쪽으로 퍼져나갔다. 현대 일본인의 유전자와 유골 형태는 그들이 한국에서 도착한 농경민과 현재 아이누인과 유사한 죠몬인에 해당하는 일본 선주민 사이의 혼혈로 등장했다는 가설을 제안한다. 현대 일본인과 선사 시대 유골에서 추출한 DNA 결과가 남서쪽에서 북동쪽 방향으로 유전자 기울기가 형성되고 있어 이 가설을 증명해준다.) Japanese origins would thus rival Bantu origins as the most conco...

가야에도 관심을 - 가야연구 맛보기 (6) : 구야국(혹은 금관국) 건국과 수로왕 설화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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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어디서부터 국가라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엄밀한 정의 없이 삼한-원삼국 시대의 지역 정치체들을 XX국이라고 이름붙여서 사용하는 현상을 한번쯤 생각해 봐야겠습니다만, 목곽묘가 등장한 시점에 고고학적 지표가 일신하고 부장품이 풍성해지며 신분층의 분화를 짐작할만한 하다는 점에서 구야국의 건국 시기 역시 김해 근처에서 목곽묘가 등장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삼을만 하다 하겠습니다.(1,2)  김해의 초기 목곽묘는 양동리와 대성동을 들 수 있는데 2세기 중후반 목곽묘가 등장할 시기에는 양동리가 더 우세했으나 3세기 중후반에 들어서면 대성동 고분군이 최상위 고분이 됩니다. 양동리 고분군이 두각을 드러낼 무렵 근처 목관묘 단계에서 두드러졌던 창원 다호리는 쇠퇴하게 되는데 이를 두고 다호리의 정치체가 양동리로 이동했다는 견해(4)도 있으나 김해의 물질 문화 변동 폭이 매우 큰 관계로 다수의 사람들이 이동해 갔을 수는 있겠지만 정치체 전체가 동시에 이동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5) 구야국의 건국에 대해 삼국유사가 묘사하고 있는 것을 지면 관계상 간략히 줄여보면 a. 나라가 건국되지 않은 상태에서 9명의 추장들이 평화롭게 다스렸다. b. 서기 42년 하늘에서 계시가 있어 좇았더니 금으로 만든 상자에 여섯 개의 알이 있었고 곧 사람이 되었다. 왕위에 올라 이름을 수로라 정하고 궁궐을 쌓았다. c. 석탈해가 도전했지만 패배시켰다. d.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을 왕후로 삼았다. 정도가 되겠습니다. 이 설화를 기존의 고고학 자료와 융합해 보면, 구지봉에 세워진 대성동 고분군이 등장하는 시기에 맞추어 금관국의 개국을 대성동 고분군이 축조되는 3세기 전반, 혹은 우세하게 되는 3세기 후반으로 볼 수 있지 않느냐는 주장이 가능해집니다. 아, 설화와 역사의 아름다운 콜라보레이션! 하지만 과연 대성동 최상위 고분을 구야국의 모든 것에 투사하는 것이 옳은지 저는 의문스럽습니다. 대성동 고분군은 5세기에는 갑자기 축조가 단절되는데 이는 고구려의 원정과 일맥상통하는 것...

간단한 진화론 이야기 (3) - 종(species)과 종분화(speci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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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화론을 믿지 못하는 많은 분들이 제기하는 것 중의 하나가 과연 종분화라는 것이 일어나느냐라는 것입니다. 토끼는 토끼를 낳고 독수리는 독수리를 낳으며 사람은 사람을 낳는데 종분화라는 것은 돼지가 하마를 낳고 원숭이가 사람을 낳는 일이 벌어진다는 소리와 동급이라 생각하니 해괴하게 생각하시는 것이겠죠. - 돼지가 하마를 낳는 일은 괴이하지만 돼지와 하마는 친척이긴 합니다. 그러면 해괴한 종분화 대신 종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종(種)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종이라는 것이 무슨 장벽이기에 종 내부에서의 다양성은 인정해도 종을 넘어서는 변이는 불가능한 것일까요? 널리 알려져 있는 종의 정의는 진화생물학자 에른스트 마이어가 제시한 '다른 종과 구별되는 자연적으로 교배가 일어나서 후세를 남길 수 있는 집합'을 주로 사용합니다만 이 정의는 매우 한정된 생물의 종 정의에나 합당한 정의입니다. 이 정의로 구별지을 수 없는 예들을 여러개 댈 수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종을 구별할 때 가장 우선순위에 두는 것은 형태적인 유사도이지, 교배해서 자손이 만들어지느냐 아니냐가 아니라는 겁니다. - 사람이랑 오랑우탄이랑 교배해서 자식이 나오는지 확인해보지 않아도 서로 다른 종이라는 건 당연한 이야기죠. 현재 DNA 유사도를 기준으로하는 분자계통학이 확립되기 이전에는 모두 형질(trait)의 유사도를 기준으로 분류군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이유는 우리 인간이 범주화(categorization)라는 능력을 기본적으로 탑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 능력은 나의 가족, 씨족과 타인을 구별하는데, 친구와 적을 분별하는데 도움을 주는 힘입니다. 그래서 실험으로 사람들을 임의로 두 집단으로 나눈다 하더라도 그 구성원들은 쉽게 타 집단과 아 집단의 차이를 발견하고 강화한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능력으로 자연을 분절적인 단위로 구별하는 방법이 린네가 제시한 분류군이고 그 제일 하위 단위가 species인 것입니다. 하지만 자연에는 이런 분절적...

가야에도 관심을 - 가야연구 맛보기 (5) - 변한에서 가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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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학계에서도 변한과 가야를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구분할지, 변한과 가야의 정치체제가 연결되는 것인지 구별되는 것인지 (업계 용어로 '전기론-前期論'과 ''전사론-前史論') 논란이 많습니다.(1,2) 제가 어느 것이 옳은 학설인지 평가할 주제는 못되니 그저 소개하고 저 나름대로의 의문점만 부가하는 선에서 그치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변한에서 가야로 넘어가는 시기를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를 잡는데 가장 큰 이유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변한이 기록되어 있으니 적어도 이 시기까지는 변한이 존재했을 것이고, 실제로 고고자료 상으로 각 지역 특이적인 유물이 아직 나타나지 않는 시기이기에 변-진한이 서로 비슷하다는 기록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 I가 최상위층 분묘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고고자료와 맞추어보면 어긋나는 부분이 꽤나 있는데 일차적으로 3세기 즈음에 출토되는 김해 구야국(혹은 금관국)의 물질 문화가 압도적인 반면 안야국에 비정되는 함안은 별다른 유물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물론 발굴 자료는 앞으로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지만 현 상황에서 함안 지역의 고분은 목관묘 단계에서도 특출나지 않으며 목곽묘 단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건 5세기가 되어서입니다. (도항 항목이 함안을 의미하며, 양동과 대성이 김해를 의미합니다.)(3-5) 부차적인 문제로 변진미리미동국을 밀양으로 비정하면 발생하게 되는 문제인데, 밀양은 목관묘 이후 별다른 분묘 없이 숨어 있기 때문에 삼국지의 기록이 3세기 말의 상황을 비정한 것이라면 진수의 정보원은 듣보잡 국가의 이름까지 제공해 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김해는 정치 체제의 등장을 내덕리 목관묘로 잡더라도 2세기 초, 구지로 고분군의 목관묘-목관묘 혼재 형태와 화로형무개고배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2세기 말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보다 더 올라가기는 어렵습니다.(6,7) 물론 창원 다호리 유적을 구야국의 전신으로 가정하는 분도 있습니다만.(8) 사실 목관묘 단계를 변한으로 파악하면 ...

가야에도 관심을 - 가야연구 맛보기 (4) - 변한 말의 사회변동

가야에도 관심을 - 가야연구 맛보기 (3) : 변한 제국(諸國)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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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근차근 발전하던 변한의 각 나라에 대한 소식이 저멀리 중국에까지 전해진 덕분에 변진 12국의 이름이나마 알게되었습니다. 삼국지에 변한과 진한의 각 나라를 두서없이 나열하고 있는데 24국 중 12국의 이름 앞에 변진이라는 표기를 하고 있어 이 나라들이 변한 소속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에 들지 못한 읍락들이 더 있겠지만 간단히 패스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변한과 진한이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굳이 변한과 진한을 구별해 주는 이유에 대해서 삼국지는 제사를 지내는 신이 다르다고 하지만 이유가 명확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에 대해 주보돈은 삼국지 기사에서 진한인이 이주민이라는 자의식이 있지만 변한인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비록 진한과 변한 모두 토착인이 다수이지만 지배집단이 외래계인 진한과 토착인인 변한으로 나눠진다면 모시는 조상신이 다른 것이 중국인에게는 제사를 지내는 신이 다른 것으로 비춰진 것은 아닐까 추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뉜 변한과 진한은 더 나아가 낙동강 수계의 교역망과 동해안 교역망의 연맹체로 발전하게 되어 지리적 입지가 유리한 구야국(금관국)과 사로국(신라)이 맹주로 발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1) 하지만 지배계층이 다른데 문화는 같을 수 있는지, 그것이 작은 차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문제인지는 고개가 갸웃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아무튼 변진에 속하는 나라의 이름은 각각 변진미리미동국, 변진접도국, 변진고자미동국, 변진고순시국, 변진반로국, 변진악노국, 변진미오야마국, 변진감로국, 변진구야국, 변진주조마국, 변진안야국, 변진독로국입니다. 과연 이 나라들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여러 연구자들이 나름의 가설을 제시했습니다만 명확히 결론난 것은 별로 없습니다. 위 국가 중에서 금관국과 안라국에 이어질 것으로 생각되는 변진구야국과 변진안야국, 각각 밀양과 고성으로 비정되는 변진미리미동국, 변진고자미동국을 제외하고는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뭐라 말할 수 없는 혼돈 속에 있습니다. 이 중에서 위치가 암...

가야에도 관심을 - 가야연구 맛보기 (2) : 변한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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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이 완전하게 남아 있는 시대가 아닌 고고학이 담당하는 시대는 사서와 달리 정확한 연도와 날짜를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고고학적으로 따라갈 수 있는 변화를 추적함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그 추이를 추측할 수 있어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국가와 국가 하위 집단을 나누는 기준이 애매한만큼 변한이 국가의 기틀을 언제부터 다지게 되었는지, 그 지표 유물이 무엇인지는 연구자마다 기준이 다를 수 있기에 앞서의 글에서 변한이 기원전 3세기에 등장했다는 소리는 ±기백년의 오차를 미리 깔고 하는 소리가 되겠습니다. 당시 영남지역의 국가 발전을 유도할만한 주요한 인구 이동의 요인은 아래와 같습니다. 한반도 서북쪽에서 지속적인 혹은 간헐적인 문화적-인구학적 충격과 교류가 이어졌고 이에 전파된 변화의 물결이 영남지방에 완전히 정착되는 건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 정도로 생각됩니다. 이 시기에 들어서면  과도기 동안 계속해서 생산되던 민무늬토기가 최종적으로 소멸하고 기원전 2세기 경 원형 점토대 토기에서 삼각형 점토대 토기를 거쳐 기원전 1세기 무렵 고식(古式) 와질토기의 생산이 시작되게 됩니다.  고식 와질토기 청동기문화가 영남지역에 정착되면서 목관묘에 청동 유물이 함께 부장되는데, 초기에는 서북 낙랑지역의 영향이 나타나며 후기에는 마한의 영향이 두드러집니다. 낙랑과 마한 지역에서 들어오는 각종 청동 유물이 당시 등장한 초기 지배집단의 위세를 보여주는 용도로 사용되었겠지요. 부장품의 종류와 양은 진한지역이 더 풍성하고 많지만 토기 문화는 아직 진-변한이 분화되지 않고 동일한 문화 안에서 교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3) 지역 특징적으로 관의 위에 유물을 두는 상층부장이 나타나며 이는 낙랑의 목곽묘 묘제의 영향을 받은 마한에서 유물을 관 둘레에 부장하던 관습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진-변한의 정치세력과 관련해 좀 더 지역토착적인 영향이 강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4) 1) 이춘선, "영남지방 초기철기~원삼국시대 옹관묘의 변천과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