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에도 관심을 - 가야연구 맛보기 (22) : 신라의 낙동강 하류 공략
자연 장애물 지형인 낙동강과 속칭 영남알프스라고 불리는 경남 동부의 산맥이 신라의 가야권으로의 팽창을 억제한 덕분인지, 신라의 관심사가 북의 고구려나 서의 백제에 쏠려 있었기 때문인지 여러 요인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한동안 가야와 신라는 서로 크게 얽히는 일 없이 지내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백제가 가야의 서쪽 변경을 침탈해 오는 6세기 초, 이 안정적인 국경선에도 요동이 치기 시작합니다. 신라의 가야 지역 공략에 대해서 삼국사기는 매우 간략한 내용을, 일본서기는 매우 혼란스러운 전승을 기록하고 있어 실질적인 양상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대략적인 흐름만 이해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법흥왕 19년 - 532년) 금관국金官國의 왕인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세 명의 아들 즉 큰아들인 노종奴宗, 둘째 아들인 무덕武德, 막내 아들인 무력武力을 데리고 나라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예로써 대접하고 상등上等의 벼슬을 주었으며,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인 무력은 벼슬이 각간角干에 이르렀다. (이사부열전) 지도로왕智度路王(지증왕)때 연해 변경 지역의 지방관이 되었다. 거도居道의 임기응변의 꾀를 답습하여 마희(馬戱)로써 가야국加耶國(혹은 가라加羅라고 한다)을 미혹시켜 그것을 빼앗았다. (계체 23년 - 529년) 이 달 사신을 보내어 기능말다간기己能末多干岐를 보냈다. 아울러 임나에 있는 오미 케누(近江毛野臣, 앞의 오무라지와 같은 직급 칭호, 오미臣)에게 명령하여 “아뢴 바를 알아보고 서로 의심하는 것을 화해시키라”고 하였다. 이에 오미는 웅천熊川(혹은 임나의 구사모라久斯牟羅)에 머물면서 신라와 백제 두 나라의 왕을 불러 모았다. 신라왕 좌리지佐利遲는 구지포례久遲布禮를 보내었고 백제는 은솔恩率 미등리彌騰利를 보내어 오미가 있는 곳에 가서 모이게 하고 두 왕은 참석하러 오지 않았다. 오미가 매우 화를 내며 두 나라 사신을 꾸짖기를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도이다. 무엇 때문에 두 나라의 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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