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에도 관심을 - 가야연구 맛보기 (2) : 변한의 발전

 기록이 완전하게 남아 있는 시대가 아닌 고고학이 담당하는 시대는 사서와 달리 정확한 연도와 날짜를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고고학적으로 따라갈 수 있는 변화를 추적함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그 추이를 추측할 수 있어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국가와 국가 하위 집단을 나누는 기준이 애매한만큼 변한이 국가의 기틀을 언제부터 다지게 되었는지, 그 지표 유물이 무엇인지는 연구자마다 기준이 다를 수 있기에 앞서의 글에서 변한이 기원전 3세기에 등장했다는 소리는 ±기백년의 오차를 미리 깔고 하는 소리가 되겠습니다. 당시 영남지역의 국가 발전을 유도할만한 주요한 인구 이동의 요인은 아래와 같습니다.


한반도 서북쪽에서 지속적인 혹은 간헐적인 문화적-인구학적 충격과 교류가 이어졌고 이에 전파된 변화의 물결이 영남지방에 완전히 정착되는 건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 정도로 생각됩니다. 이 시기에 들어서면 과도기 동안 계속해서 생산되던 민무늬토기가 최종적으로 소멸하고 기원전 2세기 경 원형 점토대 토기에서 삼각형 점토대 토기를 거쳐 기원전 1세기 무렵 고식(古式) 와질토기의 생산이 시작되게 됩니다. 

고식 와질토기


청동기문화가 영남지역에 정착되면서 목관묘에 청동 유물이 함께 부장되는데, 초기에는 서북 낙랑지역의 영향이 나타나며 후기에는 마한의 영향이 두드러집니다. 낙랑과 마한 지역에서 들어오는 각종 청동 유물이 당시 등장한 초기 지배집단의 위세를 보여주는 용도로 사용되었겠지요. 부장품의 종류와 양은 진한지역이 더 풍성하고 많지만 토기 문화는 아직 진-변한이 분화되지 않고 동일한 문화 안에서 교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3) 지역 특징적으로 관의 위에 유물을 두는 상층부장이 나타나며 이는 낙랑의 목곽묘 묘제의 영향을 받은 마한에서 유물을 관 둘레에 부장하던 관습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진-변한의 정치세력과 관련해 좀 더 지역토착적인 영향이 강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4)


1) 이춘선, "영남지방 초기철기~원삼국시대 옹관묘의 변천과정", '한국상보사학보', 2011, pp87-124.
2) 신영애, "영남지방 점토대토기 단계 문화접변", 석사학위논문, 2012.
3) 김영민, "삼한후기 진한세력의 성장과정연구", '신라문화', 2004, pp33-67.
4) 中村大介, "점토대토기문화와 원삼국문화의 토기부장 변화 및 국제관계", '호서고고학회', 2009, pp128-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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