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차적인 문제로 변진미리미동국을 밀양으로 비정하면 발생하게 되는 문제인데, 밀양은 목관묘 이후 별다른 분묘 없이 숨어 있기 때문에 삼국지의 기록이 3세기 말의 상황을 비정한 것이라면 진수의 정보원은 듣보잡 국가의 이름까지 제공해 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김해는 정치 체제의 등장을 내덕리 목관묘로 잡더라도 2세기 초, 구지로 고분군의 목관묘-목관묘 혼재 형태와 화로형무개고배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2세기 말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보다 더 올라가기는 어렵습니다.(6,7) 물론 창원 다호리 유적을 구야국의 전신으로 가정하는 분도 있습니다만.(8) 사실 목관묘 단계를 변한으로 파악하면 삼국지에서 말한 곽은 있으나 관은 없다라는 구절 해석부터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다. 물론 중국인이 생각하는 관과 곽의 개념과 현재의 목관, 목곽의 개념이 달라서 그렇다고 넘어갈 수는 있긴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변한에서 가야로의 전환이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각 지역마다 그 전환 시점을 편년하는 것이 가능한지, 그것이 의미있는 작업인지는 알 수 없네요. 저도 읽다보니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ㅎ
지금 상황에서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사항은...
a. 변한이 언제 가야로 전환되었는지, 무엇이 바뀌었는지 '지금'은 특정할 수 없다.
b. 안라국의 실체가 생각보다 부실하다.
c. 구야국의 건국시기는 창원 다호리 시기로 생각한다면 기원전 1세기, 김해 구지로 28호분을 생각한다면 기원 2세기, 대성동 29호분으로 생각한다면 3세기 중반. 입맛대로 고르세요.
1. 박대재, "변한의 '왕'과 구야국 : 3세기 전반을 중심으로", '한국사학보', 2006, pp9-45.
2. 문창로, "광복 이후 가야사 연구의 동향과 과제", '한국학논총', 2012, pp1-40.
3. 권지영, "변-진한사회의 발전양상에 대한 연구 : 목관묘에서 목곽묘로의 전환을 중심으로", 2004, 석사학위논문.
4. 조영제, "고고자료를 통해 본 안라국(아라가야)의 성립에 대한 연구", '지역과 역사', 2004, pp41-68.
5. 김세기, "가야지역 고분자료와 묘제의 지역성 고찰", '영남학', 2008, pp165-210.
6. 이재현, "변-진한사회의 고고학적 연구", 2002, 박사학위논문.
7. 박광춘, "금관가야 토기의 표준형식과 연대", '호남고고학보', 2011, pp99-127.
8. 백승충, "가야문화권의 성립과 그 의미", '영남학', 2008, pp6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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