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에도 관심을 - 가야연구 맛보기 (6) : 구야국(혹은 금관국) 건국과 수로왕 설화 비판

 과연 어디서부터 국가라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엄밀한 정의 없이 삼한-원삼국 시대의 지역 정치체들을 XX국이라고 이름붙여서 사용하는 현상을 한번쯤 생각해 봐야겠습니다만, 목곽묘가 등장한 시점에 고고학적 지표가 일신하고 부장품이 풍성해지며 신분층의 분화를 짐작할만한 하다는 점에서 구야국의 건국 시기 역시 김해 근처에서 목곽묘가 등장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삼을만 하다 하겠습니다.(1,2) 


김해의 초기 목곽묘는 양동리와 대성동을 들 수 있는데 2세기 중후반 목곽묘가 등장할 시기에는 양동리가 더 우세했으나 3세기 중후반에 들어서면 대성동 고분군이 최상위 고분이 됩니다. 양동리 고분군이 두각을 드러낼 무렵 근처 목관묘 단계에서 두드러졌던 창원 다호리는 쇠퇴하게 되는데 이를 두고 다호리의 정치체가 양동리로 이동했다는 견해(4)도 있으나 김해의 물질 문화 변동 폭이 매우 큰 관계로 다수의 사람들이 이동해 갔을 수는 있겠지만 정치체 전체가 동시에 이동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5)

구야국의 건국에 대해 삼국유사가 묘사하고 있는 것을 지면 관계상 간략히 줄여보면
a. 나라가 건국되지 않은 상태에서 9명의 추장들이 평화롭게 다스렸다.
b. 서기 42년 하늘에서 계시가 있어 좇았더니 금으로 만든 상자에 여섯 개의 알이 있었고 곧 사람이 되었다. 왕위에 올라 이름을 수로라 정하고 궁궐을 쌓았다.
c. 석탈해가 도전했지만 패배시켰다.
d.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을 왕후로 삼았다.
정도가 되겠습니다.

이 설화를 기존의 고고학 자료와 융합해 보면, 구지봉에 세워진 대성동 고분군이 등장하는 시기에 맞추어 금관국의 개국을 대성동 고분군이 축조되는 3세기 전반, 혹은 우세하게 되는 3세기 후반으로 볼 수 있지 않느냐는 주장이 가능해집니다. 아, 설화와 역사의 아름다운 콜라보레이션!

하지만 과연 대성동 최상위 고분을 구야국의 모든 것에 투사하는 것이 옳은지 저는 의문스럽습니다. 대성동 고분군은 5세기에는 갑자기 축조가 단절되는데 이는 고구려의 원정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전쟁에 패한 이후 복속하던 주변 국가가 떨어져 나간 이후로 그 위세가 예전만 하지 못하기 때문이겠지요. 실각 정도가 아니라 일족이 죽임을 당하거나 강제로 끌려갔을 수도 있겠습니다.(6) 이에 이 시기에 대성동 고분군 조성 세력이 일본으로 도피, 이주해 스에키 토기 문화를 열었다는 주장을 신경철, 조영제 등이 하였으나, 초기 스에키 토기와 공반된 편백나무가 389년을 가리키면서 입맛이 쓰게 되었습니다.(7,8) 마찬가지로 동시기에 축조되던 다른 김해의 고분군들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채 유지되고 김해식 문화도 여전히 유지됩니다. 삼국유사에서도 왕통의 교체에 대한 별다른 언급이 없는데 만약 대성동 고분의 축조 중단이 구야국의 정치체 변동과 관련 없다면 마찬가지로 대성동 고분군의 축조 개시나 우세 여부도 구야국의 정치체 변동과 관련 없겠죠.

수로왕 설화에 역사적인 무언가가 반영되어 있다는 믿음의 근거는 수로왕이 구지봉에 내려왔고, 그 자리에 고분군이 축조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금관국의 개국을 대성동 고분군과 등치시킬 수 있는 건 수로왕 설화에서 구지봉을 언급했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이는 순환 논리에 불과하죠. 대성동 고분군이 아닌 다른 증거로 수로왕 설화의 신빙성을 높여야 대성동 고분군을 실제 구야국 개국 역사로 환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대성동 고분군 축조 세력이 구야국을 건국했다는 추가적인 사료가 발견되어야만 수로왕 설화가 현실을 반영한 전설이라는 것이 증명될 수 있는 겁니다. 추가적인 사료의 발굴은 기대하기 어려우니 수로왕 설화를 짧은 소견으로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허황옥 설화는 후대에 형성된 설화입니다.(9) 이 중에서 배를 타고 왔다는 것은 건질 수 있는 것 아닌가 하실 수 있습니다만 인도에서 온 것도 믿을 수 없는데 배를 타고 온 건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초기 불교 전파를 증명할 수 있는 유물이 등장하면 모르겠으나 현 상태로는 수로왕 설화의 진실 여부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석탈해와의 일전 기록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석탈해의 왕묘가 특정되고 편년되기 전에는 신라 초기 기년을 구야국의 연대 비정에 맞추어 편년하고 이를 다시 구야국의 연대 비정에 동원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수로왕이 다른 다섯 사람과 함께 등장하는 설화가 이미 후대의 6가야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지봉에 내려왔다는 것 역시 원래의 역사를 반영하는 것인지 후대의 인식이 반영된 것인지 구별할 방법이 없습니다. 설화로 역사를 복원한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가야에 대한 기록이 매우 부족하기에 남겨진 기록들을 신빙성 있는 것으로 만들어 보려는 노력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해서 복원한 이야기가 오히려 실제 역사를 가려버리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특히 아마추어 수준에서 무리한 음상사나 무분별한 기년 수정은 지양되어야 하겠습니다.


1. 박대재, "국가형성기의 복합사회와 초기국가", '선사와 고대', 2013, pp227-281.
2. 김영민, "삼한후기 진한세력의 성장과정연구", '신라문화', 2004, pp33-67.
3. 박광춘, "금관가야 토기의 표준형식과 연대", '영남고고학보', 2011, pp99-127.
4. 백승충, "가야문화권의 성립과 그 의미", '영남학', 2008, pp61-109.
5. 권지영, "변-진한사회의 발전양상에 대한 연구 : 목관묘에서 목곽묘로의 전환을 중심으로", 석사학위논문.
6. 허재혁, "고구려 남정 이후 김해지역의 정치적 동향", '지역과 역사', 2003, pp131-162.
7. 박천수, "신라 가야고분의 역연대", '한국상고사학보', 2010, pp71-102.
8. 박광춘, "일본 초현기 수혜기의 시원과 생산 배경", '호남고고학보' 2012, pp49-77.
9. 조명제, "경남의 불교문화", '영남문화연구', 2011, pp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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