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진화론 이야기 (1) - 진화론이란 무엇인가

  투표 게시판에 올라온 생물의 기원과 종의 분화에 대한 댓글을 보고 진화론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글을 써 봅니다. 저의 글 재주도 부족하다는 것도 알고, 역사카페에 이과 냄새 나는 글을 쓰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것도 압니다만 제 전공이 생물이다보니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치는 것처럼 저도 참기가 어렵네요. 미리 양해의 말씀 드립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진화론은 생명의 탄생을 다루는 학문은 아닙니다. 이는 진화론을 구성하고 있는 명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진화론은 단 두 명제로 작동합니다. 첫째,  각각의 개체들 사이에 유전적 다양성이 존재한다.  둘째,  개체의 생존과 번식이 그 유전적 차이에 의해 영향을 받아 유전자의 다양성이 변동된다.  즉, 진화론은 생명체가 끊임없이 변하는 원동력에 대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많은 분들이 간과하는 사실입니다만 진화론은 생물이 화학 합성물에서 시작되었든, 외계 생물이 뿌린 것이든, 지적 설계자 혹은 신이 만들어 낸 것이든 딱히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진화론은 최초의 생물이 어떻게 다양한 자손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학문이니까요. 하디-바인베르크의 법칙은 종 내부의 유전적 다양성이 세대를 내려가면서 필연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유전적 다양성이 보존되려면 집단 안에서 무작위로 교배가 일어나야 하며, 집단 내 구성원의 수가 크고, 돌연변이나 이주가 없어야 하며, 거기에 자연선택이나 성선택이 존재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를 만족하는 조건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이전 세대와 다음 세대간은 유전자 비율이 달라지게 되고 이것이 쌓이면 결국 처음 세대와 마지막 세대 간에는 굉장히 큰 간격이 나타나 형태나 행동 습성 등이 판이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변질된 집단이 생겨나는 것을 종 분화라고 하며, 역으로 현재는 달라보이는 두 종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의 공통 조상을 공유하는 한 집안임을 그려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

인간이 털이 없는게 진화과정에서 무슨 잇점이 있나요?

  M. J. Rantala (2007) - Evolution of nakedness in Homo sapiens,   J Zool.   에서 발췌 1. 체온 감소를 위해서라는 설 - 반박 : 털이 없으면 낮에는 피부가 더 빨리 뜨거워지고 밤에는 체온 손실을 피할 수 없음. 사바나의 원숭이들이 숲에 사는 유인원보다 털의 밀도가 높은 것이 이를 반증함 2. 육식을 위한 사냥에 적합해서라는 설 - 반박 : 사냥을 주로 했을 남자가 여자보다 더 털이 많은 정반대 현상을 설명할 수 없음 3. 이족보행설 - 반박 : 이족보행이 털이랑 뭔 상관 4. allometry 설 - 체형이 커지면 부피/표면적 비율이 바뀌어서 대형 동물은 상대적으로 털이 적어짐 - 반박 : 고릴라는? 5. 옷 가설 - 반박 : 털이 없어지는 건 최소 120만년 전. 최초의 옷감 유물은 2만년, 최초의 무두질 도구의 등장은 30만년 전. 옷이 등장하기 이전에 인류의 조상은 이미 털없는 유인원 상태였음. 6. 유형성숙neoteny 가설 - 반박 : 그러니까 진화적으로 자연 선택될 수 있는 장점이 뭐냐고. 7. 썩은 고기 청소부 가설 - 썩은 고기를 먹는 대머리독수리나 콘도르의 털 없음에 착안하여. - 반박 : 그럼 수염부터 없어져야지 8. 피부 접촉이 상호간의 친밀함을 높여서 - 반박 : 그런다고 온몸의 털이 다 없어지냐. 마주보는 가슴 털은 남아 있고 등 부분의 털은 왜 없어짐? 9. 유인원 수생생활설 - 반박 : 논문에 제시된 여러 구구절절한 반박을 일일이 언급하지 않겠음. 이단임. 10. 외부 기생충 저항설 Belt (1874년) - 털이 없으면 외부 기생충에 더 잘 견디지 않겠어요? Darwin (1888년) - 그럼 다른 유인원은 기생충이 없어서 털이 남아있냐? 10.1 업데이트 된 기생충 저항설 Homo habilis  시절인 180만년 전부터 베이스캠프 개념이 생겨나서 상당 기간을 같은 공간에서 지내게 됨. 이는 외부 기생충이 번창할 수 있는 환경...

동국정운 서문을 다시 들여다보며...

  카페에서 훈민정음으로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훈민정음과 관련된 논의에 대한 저의 이해도 다시 돌아보게 되는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김첨지 회원께서 저를 집어서 글을 남기셨기에 빠른 시간내에 답을 하고자 하였으나 개인적인 게으름과 함께 잠시 논문 접속에 문제가 생겨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습니다. 이왕 논문 접속이 안되니 동국정운이나 자세히 좀 볼까하다가 동국정운 서문에서 이미 자세한 설명을 담고 있어 제가 감히 주(註)를 한다는 마음으로 덧붙이고자 합니다. 아울러 과거에 동국정운에 대해서 좀 폄하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 자리를 빌어 반성합니다. "하늘과 땅이 화합하여 조화(造化)가 유통하매 사람이 생기고, 음(陰)과 양(陽)이 서로 만나 기운이 맞닿으매 소리가 생기나니, 소리가 생기매 칠음(七音)이 스스로 갖추이고, 칠음이 갖추이매 사성(四聲)이 또한 구비된지라, 칠음과 사성이 경위(經緯)로 서로 사귀면서 맑고 흐리고 가볍고 무거움과 깊고 얕고 빠르고 느림이 자연으로 생겨난 이러한 까닭으로, 포희(庖犧)가 괘(卦)를 그리고 창힐(蒼頡)이 글자를 만든 것이 역시 다 그 자연의 이치에 따라서 만물의 실정을 통한 것이고, 심약(沈約) ·육법언(陸法言) 등 여러 선비에 이르러서, 무리에 따라 나누고 종류에 따라 모아서 성조(聲調)를 고르고 운율(韻律)을 맞추면서 성운(聲韻)의 학설이 일어나기 시작하매, 글 짓는 이가 서로 이어서 각각 기교(技巧)를 내보이고, 이론(理論)하는 이가 하도 많아서 역시 잘못됨이 많았는데, 이에 사마 온공(司馬溫公)이 그림으로 나타내고, 소강절(邵康節) 이 수학(數學)으로 밝히어서 숨은 것을 찾아내고 깊은 것을 긁어내어 여러 학설을 통일하였으나, 오방(五方)의 음(音)이 각각 다르므로 그르니 옳으니 하는 분변이 여러가지로 시끄러웠다. 대저 음(音)이 다르고 같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다르고 같음이 있고, 사람이 다르고 같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방이 다르고 같음이 있나니, 대개 지세(地勢)가 다름으로써 풍습과 기질...

신석기-청동기 유럽-중앙아시아의 인구 이주에 대한 최신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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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B Damgaard et al. (2018) - The first horse herders and the impact of early Bronze Age steppe expansions into Asia,  Science 논문 취지 간단 요약 빙하기가 끝난 이후 유라시아 권역의 수렵채집인 집단들. 코카서스 수렵채집인과 북유라시아수렵채집인, 동아시아 수렵채집인은 이미 4만년 전에 갈라진 먼 집단 사람들. 동유럽의 수렵채집인과 북유라시아 수렵채집인은 비교적 가까운 친척으로 약 1만 5천년전에 분화된 집단. 농경 개시직전인 기원전 1만년전에는 서로 갈라진지 5천년 정도될 시점이다. 동아시아 수렵채집인 역시 이후 동아시아 농경민이 될 집단과 서로 갈라진지 5천년 정도 되었다. 메소포타미아 북부-터키 남부에서 농경이 시작되었다. 농경으로 인한 인구증가는 인구 이주를 불러 일으켰다. 아나톨리아의 신석기농경민은 서쪽의 유럽으로, 이란의 신석기 농경민은 동쪽의 아프가니스탄으로 이주해간다. 유럽으로 이주해간 아나톨리아 신석기농경민은 유럽의 수렵채집인과 섞여 유럽 신석기농경민을 형성한다. 인도-유럽어족의 고향을 아르메니아로 설정했을 때의 원(proto) 인도-유럽어족의 확산. 히타이트어를 포함한 (인도유럽어족의) 아나톨리아어 사용자의 고인골 유전체를 분석했을 때 동유럽의 수렵채집인 유전체의 흔적이 드러나지 않았다. 이는 원 인도-유럽어족의 고향이 흑해북쪽이었을 경우 피할 수 없는 원 인도-유럽어족 사용자와 동유럽 수렵채집인 사이의 인적 교류가 일어나기 이전에 아나톨리아어 선조 집단이 분리되어 나왔어야 한다는 제한조건을 만들어낸다. 이런 복잡한 가정대신 원 인도-유럽어족의 고향을 아르메니아로 두고 아나톨리아어가 나머지 인도-유럽어와 분리되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앞으로 인도-유럽어족의 이름도 인도-아나톨리아어족으로 바뀔 가능성이 커졌다. 동아시아의 수렵채집인이 북상하여 바이칼호 근처의 북유라시아 수렵채집인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 흑...

최근의 한중간 고대사 논쟁 상태.

  오대양 (2018) - "산동 악석문화의 최근 연구동향과 쟁점 -우리 상고문화의 영역에서 작용되는 몇 가지 문제에 관하여-", '한국상고사학보', pp35-64. <전략> 2. 동이관련 연구의 비판적 검토  현재 중국학계에서는 용산Longshan-악석Yueshi 문화로 연결되는 산동지역 신석기~초기 청동기시대유적을 동이문화로 파악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당시에 과연 사회·정치·문화적으로 단일한 종족적 개념으로서의 동이관념이 존재하였을 지에 대한 의문이 강하게 제기된다...  같은 책(중국 산동지역의 동이)에서 박선미는 현재의 이해관계에 따라 고대역사를 재해석하는 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중국 민족을 형성한 대표적인 고대 종족으로서 동이를 강조하다가 최근에는 한족漢族이 동이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하는 점, 이는 곧 동북 동이와 산동의 동이를 동일한 계통으로 강조함으로써 중국 민족사의 범위를 확대하고 변경지대에 대한 영유권의 전통을 강조하는데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박선미 2018: 45).  반면 국내 일각에서는 이상 중국학계의 연구성과를 오인하여 고대 산동지역의 동이를 한민족과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존재한다. 여기에서는 산동의 동이족과 동북 동이를 같은 계보로 파악하는 한편 중국 고대의 성인들인 요, 순, 치우, 공자 등이 산동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한민족의 조상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이들의 연구는 사료의 오독 혹은 지나친 확대 해석이라는 지적에 직면하여, 다양한 고고학적 성과들을 근거로 제시하곤 있지만 동이집단 혹은 그 문화의 내용과 구성, 위치 등에 대한 구체적인 실증작업이 결여되었다는 점에서 꾸 준히 비판받고 있다.(기수연 1992: 8; 오강원 2012; 2015) 이외에 국내 고대사학계의 몇몇 원로들 역시 유사한 맥락에서 동이족의 이동과정을 설명한 바 있는데, 상고시기 중국의 북변에 거주하였던 동이계 종족들의 이동과정 중 한 갈래가 중국 산동 방면으로 이주하면서 상대의 한족과 교섭...

양성지 - 나는 중국의 알박기가 싫다

  중국의 요동 점유에 대한 조선의 반응을 좀 보다가 찾게된 조선 전기 양성지 어르신의 말씀입니다. 세조실록 40권, 세조 12년 11월 2일 경오 3번째기사 1466년, 시무8조에 관한 대사헌 양성지의 상소문 ...중국 조정에서 장차 개주(開州) 등지에 위소(衛所)를 세우려고 하니, 이것은 국가 문정(門庭)의 걱정입니다. 평안도(平安道)의 백성들은 다만 방수(防戍)에만 시달릴 뿐 아니라 또한 중국에 입조(入朝)하는 사신의 영접과 전송을 하는 데에도 매우 시달리게 되어, 태반이 동팔참(東八站)과 해주(海州)·개주(蓋州) 등 여러 주(州)에 유입(流入)하게 되므로, 한편으로는 토병(土兵)이 모두 없어지게 되고, 한편으로는 저들이 우리의 허실(虛實)을 알게 되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비록 후일 우리의 이익이 된다 하더라도 또한 후일 우리에게 해가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지금의 계책으로는 정조사(正朝使)·성절사(聖節使) 이외의 사하사(謝賀使)·주문사(奏問使)·진응사(進鷹使) 등은 전일에 비하여 3분의 1을 줄이고 이를 합쳐서 보내게 하고, 혹은 정조사(正朝使)·성절사(聖節使) 등에게 붙여서 다시 건량(乾糧)의 수량을 줄이고 무역(貿易)의 금령(禁令)을 더욱 엄중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한다면 영접하고 전송하는 폐해도 종식될 수가 있을 것이며, 또 안주(安州) 이북의 공물(貢物)은 다른 도(道)에 없는 초서피(貂鼠皮)·인삼(人蔘) 이외의 것은 일체 영구히 없애고 오랑캐에게 들어갔다가 본국(本國)에 돌아온 사람은 3자급을 뛰어올려서 관직을 제수하고 5년을 한하여 복호(復戶)하게 하소서. 이에 강변(江邊)과 위원(渭原)의 백성은 만포(滿浦)에 합치고, 이산(理山)을 입석(立石)에 옮기고, 벽동(碧潼)을 성간(城干)에 옮겨서, 각기 1고을을 설치하여 강계(江界)의 길을 통하게 하고, 창성(昌城)을 삭주(朔州)와 정녕(定寧)에 합쳐서 또한 첨사(僉使)를 두고, 다만 토병(土兵)만 남겨 두고는 남방의 백성은 들어와서 지키지 못하게 할 것이니, 이와 같이 한다...

동아시아의 신석기 문화 (6) - 후리Houli/북신Beixin 문화

  Houli culture는 산동지역에서 성립된 신석기 문화 중 가장 이른시기의 문화입니다. 황하 중류 지역의 신석기 문화와 마찬가지로 Houli 문화에서도 초보적인 기장 농사가 시작된 것으로 생각되며 요하에서 작물화된 조粟도 산동지역에서 재배되었습니다. 산동성 Linyi臨沂시 페이費현의 Yuezhuang月莊 유적에서는 벼의 낱알이 발견되어 산동지역과 양자강 중류 사이의 교류의 증거 역시 관찰되고 있습니다. 유적지에서 돼지뼈가 빈번하게 출토되어 돼지를 특별히 즐겼거나 돼지 사육이 시도된 흔적으로 생각됩니다. 토기 중에서는 가마솥이 상당히 많이 발견되어 식생활을 짐작케 해 줍니다. 그 외의 토기는 별다른 장식 없이 간단한 편으로 상대적으로 토기 생산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상태로 보입니다. Houli culture의 정착지는 해자로 둘러싸인 형태임이 드러나 고고학자들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해자의 폭은 넓은 곳은 40m, 좁은 곳은 4m 정도로 깊이는 2.5m에서 5m에 이릅니다. 이는 Houli culture의 시기에 군사적인 충돌 위협이 대두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집자리 유적 중에서 화덕이 있는 집과 화덕이 없는 집이 존재하는데 화덕이 없는 집은 생활 공간이 아니라 토기나 석기 제작 같은 특수한 일을 하거나 물품을 보관하던 공간으로 생각됩니다. Houli culture는 이후 Beixin culture로 이어집니다. Beixin culture에서는 토기 생산 방식이 매우 향상되었습니다. 이런 토기 제작 방식의 일신이 황하 중류의 Peiligang culture에서 영향을 받은 결과물이며, 더 나아가 Peiligang에서의 산동지역으로의 이주민이 Houli culture에서 Beixin culture로의 전환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들도 있는 모양입니다만 아직은 확답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Houli culture에서는 종종 등장했던 여러 개의 화덕을 갖춘 큰 집이 Beixin culture에서는 소멸하며 상대적으로 작은 집의 한 가운데에 하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