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지 - 나는 중국의 알박기가 싫다
중국의 요동 점유에 대한 조선의 반응을 좀 보다가 찾게된 조선 전기 양성지 어르신의 말씀입니다.
세조실록 40권, 세조 12년 11월 2일 경오 3번째기사 1466년, 시무8조에 관한 대사헌 양성지의 상소문
...중국 조정에서 장차 개주(開州) 등지에 위소(衛所)를 세우려고 하니, 이것은 국가 문정(門庭)의 걱정입니다. 평안도(平安道)의 백성들은 다만 방수(防戍)에만 시달릴 뿐 아니라 또한 중국에 입조(入朝)하는 사신의 영접과 전송을 하는 데에도 매우 시달리게 되어, 태반이 동팔참(東八站)과 해주(海州)·개주(蓋州) 등 여러 주(州)에 유입(流入)하게 되므로, 한편으로는 토병(土兵)이 모두 없어지게 되고, 한편으로는 저들이 우리의 허실(虛實)을 알게 되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비록 후일 우리의 이익이 된다 하더라도 또한 후일 우리에게 해가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지금의 계책으로는 정조사(正朝使)·성절사(聖節使) 이외의 사하사(謝賀使)·주문사(奏問使)·진응사(進鷹使) 등은 전일에 비하여 3분의 1을 줄이고 이를 합쳐서 보내게 하고, 혹은 정조사(正朝使)·성절사(聖節使) 등에게 붙여서 다시 건량(乾糧)의 수량을 줄이고 무역(貿易)의 금령(禁令)을 더욱 엄중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한다면 영접하고 전송하는 폐해도 종식될 수가 있을 것이며, 또 안주(安州) 이북의 공물(貢物)은 다른 도(道)에 없는 초서피(貂鼠皮)·인삼(人蔘) 이외의 것은 일체 영구히 없애고 오랑캐에게 들어갔다가 본국(本國)에 돌아온 사람은 3자급을 뛰어올려서 관직을 제수하고 5년을 한하여 복호(復戶)하게 하소서. 이에 강변(江邊)과 위원(渭原)의 백성은 만포(滿浦)에 합치고, 이산(理山)을 입석(立石)에 옮기고, 벽동(碧潼)을 성간(城干)에 옮겨서, 각기 1고을을 설치하여 강계(江界)의 길을 통하게 하고, 창성(昌城)을 삭주(朔州)와 정녕(定寧)에 합쳐서 또한 첨사(僉使)를 두고, 다만 토병(土兵)만 남겨 두고는 남방의 백성은 들어와서 지키지 못하게 할 것이니, 이와 같이 한다면 강계(江界)·삭주(朔州)·의주(義州) 3진(鎭)의 형세가 장건하게 될 것이며, 이산(理山)과 벽동(碧潼)은 본시 산(山) 뒤에 있어서 여연(閭延)·무창(茂昌)과 같이 일체(一體)가 될 것이며, 강역(疆域) 가운데에 있어서 예전과 같을 것이니, 적인(狄人)이 진실로 엿볼 수도 없을 것이며, 또한 들어와 침범할 수도 없을 것이므로, 방수하는 폐단이 어찌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 중국놈들이 요동에 알박기를 하는데 해 될 일만 많이 있다. 중국이 가까워지니 사신이 많이 오갈텐데 이게 다 밑에 사람 고생시키는 일만 될 걸? 사신 오고 가는 일정 싹 줄이고 변경 지방 관리나 잘 합시다.
예종실록 6권, 예종 1년 6월 29일 신사 2번째기사 1469년, 국정 전반에 관한 공조 판서 양성지의 상소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본국은 안팎이 산과 강으로 되어 있어 넓이가 몇만 리(里)이고, 호수(戶數)가 1백 만이고, 군사가 1백 만으로, 요(堯)임금과 아울러 섰고, 주(周)나라에는 신하가 되지 않았고, 원위(元魏)와는 통호(通好)하였으며, 풍연(馮燕)에는 정성을 바쳤고, 수(隋)나라는 육사(六師)가 대패(大敗)하였고, 당(唐)나라는 손님으로 대우하였고, 요(遼)나라는 패군(敗軍)하여 처참하였으며, 송(宋)나라는 섬겼고, 금(金)나라는 부모(父母)의 고향이라고 일컬었으며, 원(元)나라는 사위와 장인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도 또한 삼한(三韓)이라 이르고 하하(下下)의 나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요동(遼東)의 동쪽 1백 80리는 연산(連山)을 경계로 하여 파절(把截)을 삼았으니, 성인(聖人)께서 만리를 헤아려 밝게 보시는데 어찌 토지가 비옥하여 가축을 기르거나 사냥하는 데 편리하다는 것을 모르고서 수백 리의 땅을 버려 그 곳을 비게 하였겠습니까? 진실로 동교(東郊)의 땅은 삼한(三韓)에서 대대로 지키어 양국(兩國)의 강역(疆域)을 서로 섞일 수 없게 하였으니, 만약 혹 서로 섞인다면 흔단이 일어나기 쉽기 때문입니다. 지금 듣건대, 중국에서 장차 동팔참(東八站)의 길에 담장[墻]을 쌓아서 벽동(碧潼)의 경계에 이르게 한다고 하니, 이는 실로 국가의 안위(安危)에 관계되는 바이므로,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보다 앞서 본국 평안도(平安道)의 백성 가운데 부역(賦役)에서 도망한 자가 저곳에 흘러 들어갔으니, 동쪽으로는 개주(開州)로부터 서쪽으로는 요하(遼河)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러, 대개 고을의 취락(聚落)이 서로 바라보이는데, 몇천만 명이나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영락(永樂) 연간에 만산군(漫散軍)은 모두 4만여 인이었는데, 근년(近年)에 요동(遼東)의 호구(戶口) 가운데 동녕위(東寧衛)에 십분의 삼이 살고 있습니다. 만약 장장(長墻)이 없다면 야인(野人)이 출몰(出沒)할 것이니 진실로 염려스럽고, 만약 혹 담장을 쌓는다면 도로 내지(內地)가 되어서 진실로 좋은 땅이 될 것이니, 그 유망(流亡)하는 자가 어찌 옛날보다 만만배(萬萬倍)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그 해(害)의 첫 번째입니다.만약 중국에서 연대(煙臺)를 벌여서 설치하고 둔전(屯田)을 널리 행한다면, 이와 같다면 양국의 사이에는 다만 강 하나만이 한계가 될 뿐이니, 이름은 해외(海外)라고 하여도 실로 같은 안입니다. 저들이 어찌 천백 년 동안 우리 변방을 엿보지 않았겠습니까? 혹은 이익이 되기도 하고 혹은 해가 되기도 하여 헤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 해의 두 번째입니다.장장(長墻)이 비록 요하(遼河)에서 압록강(鴨綠江)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염려할 만한 것이 있는데, 만약 벽동(碧潼)의 경계(境界)인 산양호(山羊湖) 사이에 이른다면, 이는 동한(東韓)의 땅이어서 저들의 봉역 가운데에 있으니, 사람에 있어서는 팔꿈치와 겨드랑이의 사이와 같고 인가(人家)가 울타리 안에 있는 것과 같아, 한쪽은 여기에 있고 한쪽은 저기에 있어서 저들의 주장에 달려 있습니다. 어찌 다만 장사(長沙)의 무수(無袖)뿐이겠습니까? 이것이 그 해의 세 번째입니다.이와 같은 이해(利害)는 삼척 동자(三尺童子)라도 알지 못함이 없습니다. 건주(建州)의 사람들은 형세상 반드시 와서 싸울 것이나, 가까이 들리는 일은 항상 그 실지를 잃음이 많을 터인데, 만약 진실로 이러한 일이 있는데도 태평하게 주청(奏請)하지 않는다면, 저들은 우리를 무능(無能)하다고 여기고 더욱 능욕(凌辱)하는 일이 있을 것이므로, 모름지기 급히 달려서 상주(上奏)하여야 할 것입니다. 연산 파절(連山把截)은 고황제(高皇帝)가 정한 바이므로 양국의 봉강(封疆)은 서로 어지럽힐 수 없습니다. 벽동(碧潼) 이서와 의주(義州) 이북은 큰 강이 한계로 막혀 있어서 족히 염려할 것이 못되나, 이어 김보(金輔) 등 내사(內史) 족친(族親)을 보내어 들어가서 나라 사람들의 뜻을 아뢰어 제총(帝聰)에 이르도록 하여 요하(遼河)로부터 압록강(鴨綠江)에 이르기까지 쌓도록 할 수 있다면 어찌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청(請)에 따르지 않는다면 마땅히 자치(自治)하는 일이 더욱 엄중하게 하여 만세(萬世)토록 견고하게 할 뿐입니다...
- 중국 지들이 연산을 경계로 한다면서 압록강까지 슬금슬금 들어오려고 하네. 관리가 실패하면 여진 좋은 일 되고 제대로 관리하면 아주 꿀땅이 될텐데... 안그래도 우리나라 사람들 후손이 많이 살고 있는데 도망가서 정착하기도 딱 좋네. 완전 조선에 해되는 일이야.
그리고 지금이야 사이가 좋지만 나중에 중국이 안 쳐들어온다는 보장이 있냐?
혼강까지 담장을 깔아놓으면 지금은 그냥 방어선에 불과하지만 나중에는 그게 국경의 근거가 되잖아.
성종실록 134권, 성종 12년 10월 17일 무오 1번째기사 1481년, 남원군 양성지가 중국이 개주에 위를 설치한다는 것에 대해 상언하다
신이 생각건대, 자고로 천하 국가의 사세(事勢)는 이미 이루어졌는데도 혹 알지 못하기도 하고 비록 이미 알아도 또 〈어떻게〉하지 못하니, 이것이 모두 잘못된 일중의 큰 것입니다. 일을 먼저 도모한다면 어찌 잘 다스리고 오랫동안 안전하기가 어렵겠습니까? 지금 듣건대 중국이 장차 개주(開州)에 위(衛)를 설치하려 한다 하는데, 신이 거듭 생각해 보니 크게 염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개주는 봉황산(鳳凰山)에 의거하여 성(城)을 이루었는데, 산세가 우뚝하고 가운데에 대천(大川)이 있으며, 3면이 대단히 험하고 1면만이 겨우 인마(人馬)가 통하는 이른바 자연히 이루어진 지역이므로, 한 사람이 관(關)을 지키면 1만 명이라고 당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당 태종(太宗)이 주둔하여 고려(高麗)를 정벌하였고, 또 요(遼)나라의 유민(遺民)이 여기에 근거하여 부흥(復興)을 도모하였으니, 예나 지금이나 누가 우리 나라와 관계 있음을 모르겠습니까? 지금 북쪽으로는 산로(山路)로 심양(瀋陽)·철령(鐵嶺)·개원(開元)을 가리켜 야인(野人)과 연접(連接)하였고, 남쪽으로는 해도(海道)로 해개(海蓋)·금복(金復)을 가리켜서 등주(登州)·내주(萊州)와 접하였고, 서쪽으로는 요동(遼東)·광녕(廣寧)·금주(錦州)·서주(瑞州)를 가리켜 연주(燕州)·계주(薊州)로 통하니, 저들에게는 유주(維州)의 이로움이 있고, 우리에게는 한중(漢中)의 세가 있는 실로 동도(東道) 요충(要衝)의 땅입니다. 여름에는 만경(萬頃)의 험로(險路)이면서 오히려 충분히 의거할 수 있고 겨울에는 평평하기가 숫돌 같으면서도 곧기가 화살과 같으니, 비록 형제 부모의 나라라도 이 땅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은 부당합니다. 평시에는 평안도 백성들 중 부역(賦役)을 피하는 자들의 태반이 이곳으로 가는데, 저들은 가벼운 부역으로 이들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변경 땅의 백성이 모두 그 곳으로 들어간다 하여도 그것은 일시의 해로움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 그곳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은 영원한 근심꺼리입니다. 신이 고금(古今) 천하의 형세(形勢)로 말씀드리면, 구주(九州) 안은 오직 중국 황제가 다스리는 바이며, 사해(四海)의 밖으로 서역(西域)은 총령(葱嶺)과 사막(沙漠)이 약 3만 리나 되며, 북쪽은 사막(沙漠) 불모(不毛)의 땅이어서 황막(荒漠)하기 끝이 없고, 동이(東夷)는 일본으로써 바다로 둘러쌓인 나라이며, 남만(南蠻)은 점성(占城)과 진랍(眞臘) 땅으로서 계동(溪洞)과 열병(熱病)이 심하여 중국과는 옛부터 통교가 없는 곳이며, 서쪽은 파촉(巴蜀)·검각(劍閣)으로의 길로서 진(秦)나라 때에 처음으로 개척하였고, 남쪽은 담이(儋耳)·경애(瓊崖)의 땅으로 한(漢)나라가 비로소 군(郡)을 두었습니다. 동북관(東北關) 밖은 영주(營州)·요동(遼東)·요서(遼西)의 땅이고, 서북관(西北關)의 오른쪽은 양주(涼州)·하서(河西)의 5군(郡)이 그것이며 이후에는 중국과 교통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나라는 요수(遼水)의 동쪽 장백산(長白山)의 남쪽에 있어서 3면이 바다와 접하고 한쪽만이 육지에 연달아 있으며 지역의 넓이가 만리(萬里)나 됩니다. 단군(檀君)이 요(堯)와 함께 즉위한 때부터 기자 조선(箕子朝鮮)·신라(新羅)가 모두 1천 년을 누렸고 전조(前朝)의 왕씨(王氏) 또한 5백 년을 누렸습니다. 서민(庶民)은 남녀가 농사에 부지런하고 사대부(士大夫)는 문무(文武)가 내외의 일에 이바지하여 집집마다 봉군(封君)의 즐거움이 있고 대대로 사대(事大)의 체제가 있으며, 따로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 소중화(小中華)하고 부르면서 3천 9백 년이나 되었습니다. 황진(黃溍)은 벼슬살이할 만한 나라라고 하였고, 황엄(黃儼) 또한 천당(天堂)이라 하였으며, 원 세조(世祖)는 우리로 하여금 구속(舊俗)을 그대로 따르게 하였고, 명(明)나라의 고황제(高皇帝)는 우리 스스로의 성교(聲敎)를 허가하였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성교(聲敎)를 가지게 한 것은 언어가 중국과 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습속도 역시 다르기 때문입니다. 원(元)나라 말기에 홍군(紅軍) 20만 명이 우리 나라에 쳐들어 왔을 때 우리가 대병으로써 쳐부수고 군대의 명성을 크게 떨친 사실이 천하에 알려졌기 때문이며, 또 명나라가 금릉(金陵)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우리 나라가 북원(北元)과 국경을 접한 형세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입니다. 또 중국이 동쪽에 있어서 한(漢)나라·수(隋)나라·당(唐)나라는 군사를 남용하였으나 지키지 못하였고, 요(遼)나라·금(金)나라·원(元)나라는 국경을 접했으면서도 핍박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신은 평양(平壤)을 점거하였던 중국 세력들의 흥폐(興廢)는 말할 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고구려가 풍씨(馮氏)의 남은 세력을 근거로 강성해져서 수 양제(煬帝)의 1백만 군이 살수(薩水)에서 대패하였고, 당나라 태종은 여섯 차례나 원정하였지만, 요좌(遼左)에서는 공이 없었으며, 한(漢)나라는 비록 평양을 얻었으나 곧 고구려에 점거당하였고, 당나라는 평정하였으나 역시 신라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약간의 굴곡이 있었습니다만, 삼한(三韓)의 법규를 지킨 것은 옛날과 같습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漢)나라·수(隋)나라·당(唐)나라 모두 관중(關中)에 도읍하여 우리와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요(遼)나라는 인국(隣國)이며 적국(敵國)이었으므로, 소손녕(蕭遜寧)의 30만 병이 하나도 돌아가지 못하였으며, 금(金)나라는 본래 우리 나라의 평주(平州) 사람이 세웠으므로 우리 나라를 부모의 나라라 하였고, 윤관(尹灌)이 9성(九城)을 쌓은 선춘령(先春嶺)으로 경계를 삼아 금나라가 망할 때까지 군사력을 더하지 않았습니다. 요와 금의 두 나라는 모두 서쪽에 하국(夏國)이 있었고 남쪽에는 대송(大宋)이 있어서 서로 원수 사이였는데, 어느 틈에 말머리를 동쪽으로 향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후 야율씨(耶律氏)가 서쪽으로 만리를 달렸으나 완안씨(完顔氏)의 남하로 패망하였고, 원나라는 혼인국(婚姻國)이라고 칭하였으나 수십년 동안 침략하였고, 중국과 남북의 오랑캐가 혼합되어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서 국경이 없었지만 그 말년에는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음산(陰山) 북쪽으로 들어갔습니다. 신이 다시 생각건대, 국가는 한 시대에 고식(姑息)되지 말고 만세의 계책을 세워야 하며 무사한 것을 요행으로 삼지 말고 만전의 정책을 세워야 합니다. 옛사람은 말하기를, ‘천하에 금 그릇에 비길 만한 것은 잘 보전하여 깨트리지 말며, 산하(山河)가 금에 비길 만한 것은 지켜서 잃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역대의 제왕(帝王)들이 장안(長安)·낙양(洛陽)에 도읍을 정하거나 건강(建康)·임안(臨安)에 도읍하고 혹은 북쪽으로 업(業) 땅에 도읍하거나 동쪽으로 변량(汴梁)에 도읍하였습니다. 그러나 원나라가 북쪽으로 들어간 후부터는 연도(燕都)가 남북의 요관(要關)이 되어, 북으로는 거용관(居庸關)에 의거하여 호원(胡元)의 목을 움켜잡고 앞으로는 중원(中原)에 임하고, 남으로는 사해(四海)를 제압하니, 명나라 태종(太宗) 문황제(文皇帝)가 도읍을 정한 후 실로 만세의 제왕이 옮기지 않는 땅이 되었습니다. 연도(燕都)로부터 서남쪽으로 운남 포정사(雲南布政司)까지 1백 60일정(日程)이고, 동남쪽으로는 남경(南京)까지 60일정이며, 동북쪽으로 한도(漢都)까지는 겨우 30일정이고, 더구나 개주(開州)에서 압록강(鴨綠江)까지는 겨우 1일정이니, 집 앞 뜰만큼이나 가까우며 걸상의 한쪽 끝이라 하여도 옳습니다. 지금 개주에 성을 쌓으면 개주로써 그치지 않고 반드시 당(唐)참(站)에 성을 쌓게 될 것이며, 당(唐)참(站)에 성을 쌓게 되면 당(唐)참(站)에 그치지 않고 성을 쌓지 않는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양곡(糧穀)의 운반을 요청하게 되면 양곡 운반으로 그치지 않고 반드시 소와 운반구(運搬具)를 요청할 것이며, 그것에 그치지 않고 청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것이며 농(隴) 땅을 얻으면 촉(蜀) 땅을 바라게 되는 필연의 이치입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에서 바치는 동해의 생선이 주방(廚房)의 쓰임에 충당할 만한데, 어찌 특별히 남만(南蠻)의 구장(枸醬)과 죽장(竹杖)을 쓸 것이며, 우리 나라의 궁시(弓矢)와 포백(布帛) 역시 군수(軍需)로 쓰는데, 어찌 남중(南中)의 금은(金銀)과 단칠(丹漆)만을 쓰겠습니까? 지금 당장에는 무사하다 하여도 5백 년 후에는 무력(武力)를 남용하는 자와 공 세우기를 좋아하는 자가 없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번 일은 우리 나라에서 중국에 왕래하는 새 길을 열 것을 청한 것을 계기로 병부(兵部)에서 상주(上奏)한 것이지 정동(鄭同)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동을 통해 교섭을 시작하였다면 정동을 통하여 그것을 끝내어야 하며, 그는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뒷날의 이해 관계는 역관(譯官)들에게 달렸습니다. 바라건대 ‘한씨(韓氏) 족친 중에 지위와 명망이 있는 자와 통사(通事) 중에 정동(鄭同)과 교제가 있는 자에게 명하여 토산물을 많이 가지고 바로 북경(北京)에 가서, 정동을 인해서 한씨에게 말하고 한씨가 어소(御所)에 말하여 개주위(開州衛) 설치의 정지를 청하게 하소서. 우리 고황제(高皇帝)는 만리(萬里)를 밝게 보시어 요동의 동쪽 1백 80리의 연산 파절(連山把截)로 경계를 삼으셨으니, 동팔참(東八站)의 땅이 넓고 비옥하여 목축과 수렵에 편리함을 어찌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수백리의 땅을 공지(空地)인 채로 버려둔 것은 두 나라의 영토가 서로 혼동(混同)될 수 없다는 것인데, 만일 간사한 무리들이 흔단(釁端)을 일으켜 달자(達子)나 왜인(倭人)을 가장하여 도적질한다면 실로 예측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이제 조공(朝貢)하는 사절(使節)이 옛길로 가다가 침범이 있게 되면 철저히 방비하고, 그대로 주청하면 거의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만약에 윤허를 얻지 못하면 그 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씨가 청을 할 수 없다면 그 뒤는 어찌 하겠습니까? 지금의 사세(事勢)는 바야흐로 병이 크게 도진 것과 같습니다. 7년이나 된 병에 만약 3년 묵은 쑥을 구하지 못하면 이것이 당(堂)에 있으면서 화(禍)를 알지 못하고 섶을 쌓아 놓고 위해(危害)를 알지 못함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의주(義州)는 압록강(鴨綠江)의 험함을 배경으로 한 나라의 문호(門戶)입니다만, 듣건대 그 성(城)이 대단히 허술해서 광대들은 몸을 눕히고도 올라갈 수 있고 찬비(餐婢)가 상을 이고도 내려올 만하다 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두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창주(昌洲)·벽단(碧團)·대삭주(大朔州)·소삭주(小朔州) 등의 여러 성도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만약 지금 곧 수축(修築)을 한다면 반드시 부역을 피해 유이(流移)하는 자가 많아질 것이고, 또 수축하지 않으면 방비가 허술해질 것이니, 이것이 바 로 국론(國論)을 결정하기 어려운 점입니다. 그러나 수축을 하지 않으면 의주가 없어지는 것과 다름없으며, 의주가 없어지면 하나의 도(道)가 없어지는 것이니 어찌 옳은 일이겠습니까? 신은 절실히 생각하건대, 지금 8도의 인민으로서 놀고 먹고 조부(租賦)783) 를 내지 않는 자는 승려(僧侶)만한 것이 없습니다. 승려들을 동원하여 수축함으로써 보국(報國)하게 하는 것이 옳으며, 특별한 근로(勤勞)도 없으면서 까닭없이 복호(復戶)된 자와 사복시(司僕寺) 제원(諸員) 등으로 수축하게 하여 보국하게 함도 좋을 것입니다. 또 번(番)을 서고 있는 정병(正兵)과 동원되고 있는 수군(水軍)에게 식량을 지급하여 압록강변 일대 행성(行城)을 쌓게 하고 또 따로 파절(把截)을 설치해야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도내(道內)의 공부(貢賦)도 인삼(人蔘)과 서피(鼠皮) 이외는 일체 면제 하고, 중국에 가는 사신[入朝使臣]도 정조(正朝)와 탄신(誕辰) 이외에는 정상대로 보내되, 쌍성(雙城)의 변(變)과 동녕(東寧) 사건은 마땅히 우려할 일이며, 따라서 감사(監司)·수령(守令)에게 직책이 없는 자가 따라가지 못하게 하고 가족을 데리고 가는 일도 또한 불가합니다. 삼도(三島)와 대내(大內) 등 왜인(倭人)도 마땅히 불러서 회유하여야 할 것이며, 모련위(毛隣衛)와 건주위(建州衛)의 야인(野人)도 역시 회유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앞으로의 일은 신이 감히 입으로 말하지 못하며 글로도 쓰지 못하겠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신의 말이 들어맞지 않게 된다면 국가의 복입니다.’ 하였습니다. 신도 역시 반드시 후세의 근심꺼리가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만, 사세(事勢)를 논하면 이와 같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은 조정의 의논이 이미 정해졌고 사신의 출발이 임박하였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구한 견마지성(犬馬之誠)을 다할 것을 밤낮으로 생각하다가 침묵을 지킬 수가 없어서 죽음을 무릅쓰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 중국놈들이 우리 국경 근처에서 알을 박으면 그걸로 끝이 아니여. 좀 있으면 밥 좀 달라, 반찬 좀 달라 하다가 돈도 빌리고 차도 빌리고 할 걸? 비선실세라도 동원해서 알 못박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리고 놀고 먹는 중놈들 싹 징집해서 우리도 성 쌓아야 해요.
이 어르신 상소의 다른 내용 보면 아주 애국심이라고 해야할까 우리 문화가 최고야의 느낌이랄까 뭔가 그런 마음가짐이 철철 넘칩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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