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어 역사 음운학 (5) - 상고 중국어의 음절
※ 이 글은 반오운潘悟雲 저著, 권혁준 역譯의 "중국어 역사 음운학" 내용의 요약/정리를 바탕으로 몇가지 덧붙여 적는 것입니다.
이 책의 5장, 6장은 각각 중고한어의 운모와 성조 재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으나 운모는 섭攝 이야기를 말씀드린 3장에서 운모 재구 표를 보여드린 바 있고, 성모와 같은 방식으로 재구 논리를 설명하고 있어 패스합니다. 덧붙여 상고한어는 성조가 없으므로 중고한어 성조 재구는 굳이 다룰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와 별 관련이 없는 중고한어, 상고한어를 살펴보는 이유는 훈민정음의 창제 이전에 우리나라 말은 한자를 빌어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당시의 한국어 어휘를 추론하기 이전에 당시 한자음을 복원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자의 음을 빌어 당시 우리나라 말을 기록한 금석문이나 향찰, 이두, 구결 자료는 모두 삼국시대 후기부터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체적으로 중고한어 시기에 해당하는데, 우리나라 한자음이 중고한어의 음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고대 한국어 자료를 이해할 때에 한국 한자음을 토대로 이해해도 대강의 것은 틀리지 않습니다.(물론 고대 한국어의 양상은 현재와 매우 다르긴 해도 말이지요.) 그러나 그 이전 시기에 해당하는 사기, 한서, 삼국지 등에 채록된 우리나라 인명이나 지명, 국명 자료는 상고한어 시기이므로 상고한어를 토대로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상고한어는 중고한어와 여러 면에서 매우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어 우리나라 한자음을 토대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상고한어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왜 그렇게 재구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자 하며 아무쪼록 상고한어 시기의 우리나라 어휘를 생각할 때에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명심해 주셨으면 합니다.
7장 상고上古 중국어의 음절 유형
<음절의 구성 방식>
동아시아의 언어 체계에서 음절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티베트 문자, 버마 문자, 태국 문자, 장족壯族의 고장자古壯字 문자, 베트남의 쯔놈𡦂喃, 서하 문자, 파스파 문자, 한글, 일본 가나 문자에서 음절 단위로 글자가 구성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고한어 시기 이후로 중국어의 음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initial과 final로 분할해서 생각할 수 있고, initial에는 자음consonant이, final은 핵어nucleus인 모음vowel을 사이에 두고 앞에는 개음medial이, 뒤에는 말음ending(coda)이 있는 구조가 됩니다. 이는 한국 한자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는 형태입니다. 그러나 상고한어에서도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오스트로아시아어에 속하는 Mon-Khmer어족이나 한장어족에 속하는 버마어에서는 부음절(minor syllable, sesquisyllable)이라는 형태가 나타납니다. 부음절은 성조나 강세가 있는 주음절(major syllable) 앞에 선행하는 약화음절로 부음절에는 모음이 존재하지 않거나 schwa[ə]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복자음(consonant cluster)과 다른 점은 공명정점(sonority peak)이 존재하여 음절의 특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음절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 언어들의 부음절 특성을 요약하도록 하겠습니다.
Wang Jingliu(왕경류, 王敬騮) - 팔라웅Palaung어語a. 주음절은 독립적으로 사용되지만 부음절은 일반적으로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고 조어造語, word-formation의 기능만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주음절의 성모聲母와 발음부위가 동일한 부음절의 비음鼻音 성모는 자동自動의 의미를 부여하거나, 명사화시킨다.b. 부음절에는 일반적으로 강세가 없다.c. 글자 수를 맞추는 민가民歌나 운문에서는 부음절을 독립된 한 개의 글자로 간주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반면 복자음의 경우는 결코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지 않는다.Sun Hongkai(손굉개, 孫宏開) - 드룽Drung어a. 부음절을 동반한 성모에는 복자음이 나타나지 않는다.b. 부음절은 약화 음절이고 그 모음은 가볍고 짧게 읽는다. 일정조건 아래에서는 모음이 탈락할 수 있다.c. 부음절의 모음 가운데 ɑ와 ɑŋ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고高모음이다.(i, ɨ, ɯ류), 부음절 모음 ɯ는 주음절 모음 i, u에 동화되어 i, u로 발음된다.d. 부음절의 성조는 저강조低降調인 31만 있지만 후행하는 어근이 고강조高降調인 53이면 이에 동화되어 53으로 읽는다.e. 부음절을 동반하는 어근이 다른 단어와 합성어를 구성하면 부음절은 항상 탈락한다.
중국어 방언에도 이런 부음절과 유사한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A. 중산中山·태원太原 방언에서 두 개의 자음으로 구성된 성모가 나타나는데 이 때 처음의 자음 뒤에는 schwa가 존재한다.(擺pai ~ 薄唻pəʔlai, 胞pʰau ~ 撲澇pʰəʔlau 등)B. 복주福州 방언의 절각단어切脚詞는 부음절 모음이 schwa로 약화되진 않았으나 후행 주음절과 동일한 모음으로 나타난다. 음절의 강세는 상실되지 않는다.
<티베트문자의 표기법. 기본자모 g(a)에 대해서 전치자모 b(a)는 g(a)의 앞에 별도로 적지만 상치자모 s(a)는 기본자모 위에 적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어와 함께 한장어족에 속하는 티베트어는 약 7세기 경 인도의 문자를 빌려와 티베트 문자를 만들었습니다. 현재의 티베트어는 복자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만 고대 티베트어는 복자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티베트어의 초성에 등장하는 복자음 표기의 형태가 서로 다른데 s, r, l에 해당하는 문자는 기본 자모 '위'에 있으며 상치자모上置字母라 합니다. 그 외의 음에 해당하는 문자는 기본 자모 앞에 적으며 전치자모前置字母라 합니다. 동일한 복자음을 서로 다르게 표기했다는 것은 상치자모의 복자음과 전치자모의 복자음 사이에 차이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 兪敏(유민, Yu Min)은 전치자모가 모음 a를 동반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모음이 탈락하기 쉬운 s, r, l 의 경우와 아직 부음절이 구별 가능한(약화된 모음에 의해서 or 음의 길이가 좀 더 긴 mora에 의해서) 다른 음 사이의 차이를 반영하기 위해 s, r, l은 반모음 j, w와 같이 기본 자모와 함께, 나머지는 기본 자모의 앞-뒤에 표기했을 수 있습니다. 물론 s, r, l 복자음을 반모음에 더 가깝게 인지해서 그렇다는 별도의 해석도 가능합니다.
이제 상고 중국어 자료를 살펴봅시다. 《시경·문왕文王》에서 "王之藎臣, 無念爾祖[왕의 충신, 조상을 생각한다]"에서 《모전毛傳》에 주석하기를 "無念, 念也"라 하였습니다. 이는 無(*ma : *표는 재구음임을 뜻합니다.)가 의미를 가지는 부분이 아니라 '藎臣'을 조응anaphora하는 역할로 사용되었음을 말해줍니다.(無가 藎臣의 대명사라는 의미) 《시경·거공車攻》의 "徒御不警, 大庖不盈[몰이꾼과 마부도 크게 놀라, 큰 푸줏간에 가득차는구나]" 역시 《모전毛傳》에서 "不警, 警也, 不盈,盈也"라 해서 不이 의미를 가지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서 한장어족 중 버마어는 부음절을, 티베트어는 복자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상고한어에서 역시 일정 부분의 어휘 형태소(접사)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자료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한장어족은 다음절어휘에서(특히 2음절어에서) 단음절어휘로 간결화 되는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대 중국어의 형태소는 대체로 단음절mono-syllable이지만 상고 중국어에서는 연면어聯綿詞라 해서 2음절 형태소가 꽤 발견됩니다. 대표적인 예로 요조窈窕(얌전하고 정숙한), 참차參差(올망졸망), 최외崔嵬(높고 험한), 훼퇴虺隤(지치다). 폐패蔽芾(무성한), 염읍厭浥(촉촉한) 등이 있습니다. 앞 자음이 서로 같은 경우는 쌍성雙聲이라 하고 모음이 서로 같은 경우는 첩운疊韻이라 하지만 쌍성도 아니고 첩운도 아닌 연면어도 다수 존재합니다. 유사한 형태를 오스트로아시아어나 오스트로네시아어에서도 쉽사리 찾아볼 수 있어 한장어족의 초기에는 더 많은 다음절어가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줍니다. 그러나 이런 정황증거만으로 상고한어가 부음절(혹은 다음절)이나 복자음을 가졌다고 주장할 수는 없겠지요. 차차 상고한어의 독특한 점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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