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에도 관심을 - 가야연구 맛보기 (22) : 신라의 낙동강 하류 공략
자연 장애물 지형인 낙동강과 속칭 영남알프스라고 불리는 경남 동부의 산맥이 신라의 가야권으로의 팽창을 억제한 덕분인지, 신라의 관심사가 북의 고구려나 서의 백제에 쏠려 있었기 때문인지 여러 요인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한동안 가야와 신라는 서로 크게 얽히는 일 없이 지내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백제가 가야의 서쪽 변경을 침탈해 오는 6세기 초, 이 안정적인 국경선에도 요동이 치기 시작합니다.
신라의 가야 지역 공략에 대해서 삼국사기는 매우 간략한 내용을, 일본서기는 매우 혼란스러운 전승을 기록하고 있어 실질적인 양상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대략적인 흐름만 이해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법흥왕 19년 - 532년) 금관국金官國의 왕인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세 명의 아들 즉 큰아들인 노종奴宗, 둘째 아들인 무덕武德, 막내 아들인 무력武力을 데리고 나라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예로써 대접하고 상등上等의 벼슬을 주었으며,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인 무력은 벼슬이 각간角干에 이르렀다.(이사부열전) 지도로왕智度路王(지증왕)때 연해 변경 지역의 지방관이 되었다. 거도居道의 임기응변의 꾀를 답습하여 마희(馬戱)로써 가야국加耶國(혹은 가라加羅라고 한다)을 미혹시켜 그것을 빼앗았다.(계체 23년 - 529년) 이 달 사신을 보내어 기능말다간기己能末多干岐를 보냈다. 아울러 임나에 있는 오미 케누(近江毛野臣, 앞의 오무라지와 같은 직급 칭호, 오미臣)에게 명령하여 “아뢴 바를 알아보고 서로 의심하는 것을 화해시키라”고 하였다. 이에 오미는 웅천熊川(혹은 임나의 구사모라久斯牟羅)에 머물면서 신라와 백제 두 나라의 왕을 불러 모았다. 신라왕 좌리지佐利遲는 구지포례久遲布禮를 보내었고 백제는 은솔恩率 미등리彌騰利를 보내어 오미가 있는 곳에 가서 모이게 하고 두 왕은 참석하러 오지 않았다. 오미가 매우 화를 내며 두 나라 사신을 꾸짖기를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도이다. 무엇 때문에 두 나라의 왕이 몸소 와서 천황의 명령을 받지 않고 가벼이 사신을 보내는가. 이제 비록 너희 왕이 스스로 와서 명령을 받겠다 하더라도 나는 칙을 선포하지 않고 반드시 쫓아가서 물리칠 것이다”라 하였다. 구지포례와 미등리가 마음속으로 두려워 각각 돌아가서 왕을 부른다고 하였다. 이에 신라는 그 상신上臣 이질부례지간기利叱夫禮智干岐(혹은 이질부례지나말伊叱夫禮智奈末, 이사부)로 바꾸어 보냈는데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칙을 듣기를 청했다. 오미가 멀리 병사들이 둘러싸고 있고 무리가 수천 명인 것을 보고, 웅천으로부터 임나의 기질기리성己叱己利城으로 들어갔다. 이사부는 다다라원多多羅原에 머물며 공경하여 돌아가지 않고 세 달을 기다리며 칙을 들으려고 자주 청했으나 끝내 선포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사부가 거느린 사졸들이 마을에서 걸식하고 있었는데 오미의 종자從者 카와치河內의 우마카이 미카리馬飼首御狩(首, 오비토)와 마주쳤다. 카와치는 다른 문으로 들어가 숨어서 걸식하는 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주먹으로 쳤다. 걸식자가 보고 “삼가 세 달을 기다리며 칙지勅旨를 듣고자 했으나 아직도 선포하려고 하지 않고 칙을 들으려는 사신을 괴롭히는 것은 곧 속여서 상신을 죽이고자 함임을 알겠다”라 하였다. 이에 소견을 모두 상신에게 아뢰었더니 상신은 4개의 촌(금관金官·배벌背伐·안다安多·위타委陀 혹은 다다라多多羅·소나라須那羅·화다和多·비지費智)을 노략질하여 빼앗고 사람과 물건을 다 가지고 본국에 들어갔다. 어떤 사람이 “다다라 등의 4개 촌을 노략질하게 한 것은 오미의 잘못이다”라 하였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사부열전에서 가야지역 공략에 이사부가 활약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일본서기에서도 마찬가지로 확인됩니다. 그러나 이사부열전에서는 지증왕 대에 가야를 공략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아시다시피 김해의 멸망은 법흥왕 대에 이르러서입니다. 지증왕 대에 가야의 일부지역을 점거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거나 대가야의 멸망으로 끝나는 가야 지역 복속에 깊이 관여한 이사부가 지증왕 대에 군사/정치적인 커리어를 시작했음을 말하는 자료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거도의 꾀라고 하는 것은 삼십육계의 만천과해와 상통하는 것으로 국경 근처에 주기적으로 군대를 사열해 으레 있는 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을 점령했던 일을 가리키는 일입니다. 이 임기응변으로 멸망한 가라가 가야의 일부지역을 가리키는 것인지 김해 금관국을 가리키는 것인지 사다함의 일화가 있는 고령 반파국의 점령을 말하는 것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이사부가 매우 민첩하고 기민한 용병술을 장기로 했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신라가 대대적으로 가야지역을 침탈하게 되는 계기에 대해서 일본서기는 서로 다른 전승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하나는 위에서 언급한 오미가 칙령을 선포하는 것을 미적대다가 신라의 의심을 사게 되어 공격을 받았다는 내용이며, 두번째는 신라와 가라 사이에 있었던 혼인과 그로 인한 외교적 마찰 때문에, 세번째는 오미가 포학한 정치를 하여 아리사등이 신라와 백제의 병사를 불러들였기 때문입니다.
(계체 23년 - 529년) 가라가 신라와 한 편이 되어 일본을 원망하였다. 가라왕은 신라 왕녀를 아내로 맞아(법흥왕 9년 - 522년) 드디어 자식을 두었다. 신라가 처음에 왕녀를 보낼 때에 100인을 함께 보내어 왕녀의 종자從者로 삼았다. 받아서 여러 현에 나누어 두고 신라 의관을 착용하게 했다. 아리사등阿利斯等이 복장을 바꾼 것에 화를 내며 사신을 보내어 되돌아 가게 했다. 신라가 매우 부끄럽게 여기고 생각을 바꾸어 왕녀를 되돌아 오도록 하려고 “전에는 너희들의 요청을 받아 우리가 문득 혼인을 허락하였으나, 지금 이와 같으니 왕녀를 돌려 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가라의 기부리지가己富利知伽가 “부부가 되었는데 어찌 다시 떨어질 수 있겠습니까. 또한 자식이 있으니 버리고 어찌 가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 (신라는) 마침내 길목의 도가刀伽·고파古跛·포나모라布那牟羅의 3城을 쳐부수고 또 북쪽 경계의 5城을 쳐부수었다.(계체 21년 - 527년) 여름 6월 임진壬辰 초하루 갑오甲午 오미가 군사 6만을 이끌고 임나任那에 가서 신라에게 멸망당한 남가라南加羅·탁기탄㖨己呑을 다시 세워 임나에 합치고자 하였다. 이 때 쓰쿠시노쿠니노미야코筑紫國造 이와이磐井가 몰래 반역을 도모하였는데 꾸물거리다가 해를 넘겼다. 일을 이루기 어려울까 염려하며 늘 틈을 엿보았다. 신라가 이를 알고 몰래 이와이의 거소에 뇌물을 보내어 오미의 군대를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이와이가 히노쿠니火와 토요노쿠니豐 두 나라에 세력을 뻗쳐 직무를 행하지 못하게 했다.(계체 23년 - 529년) 3월 오미를 안라安羅에 사신으로 보내어 명령을 내려 신라에게 남가라南加羅와 탁기탄㖨己呑을 다시 세우도록 권하게 하였다. 백제는 장군 군윤귀君尹貴와 마나갑배麻那甲背·마로麻鹵등을 보내어 안라에 가서 조칙을 받게 했다. 신라는 번국의 관가官家를 없앤 것이 두려워서 대인大人을 보내지 않고 부지나마례夫智奈麻禮와 해나마례奚奈麻禮등을 보내어 안라에 가서 조칙을 듣게 했다. 이에 안라는 새로이 높은 당堂을 세워서 칙사勅使를 오르게 하고 국주國主는 그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국내의 대인으로서 당에 올랐던 사람은 한둘 정도였다. 백제의 사신 장군 군 등은 당 아래에 있었는데 몇 달간 여러 번 당 위에 오르고자 하였다. 장군 군 등은 뜰에 있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계체 23년 - 529년) 여름 4월 임오壬午 초하루 술자戊子 임나왕 기능말다간기己能末多干岐가 와서 조회하였다(기능말다己能末多란 대개 아리사등阿利斯等이다) 오토모노 카나무라大伴大連金村(오무라지大連는 고분시대 천황의 측근인 호족에게 주어진 직급(1))에게 아뢰기를 “바다 밖의 여러 번국들은 응신胎中天皇이 내관가內官家를 두었을 때부터 본토를 저버리지 않았으므로 그 땅을 봉하였는데 그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라는 원래 내려주었던 경계를 어기고 자주 경계를 넘어 침략해 오니 청컨대 천황께 아뢰어 신의 나라를 구해 주십시오”라 하였다. 오토모大伴大連가 요청한대로 아뢰었다.(계체 24년 - 530년) 가을 9월 임나의 사신이 “오미가 드디어 구사모라久斯牟羅에서 집을 짓고 2년을 머물며 다스리기를 게을리 하였습니다. 이에 일본인과 임나인이 자식 때문에 자주 다투었으나 해결하기 어려웠고 처음부터 판결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미는 즐겨 誓湯(쿠카타치, 고대 일본의 신명재판 방식으로 끟는 물에 집어 넣으면 옳은 자는 무사하고 그른 자는 해를 입는다고 생각함)을 설치해 놓고 ‘진실된 사람은 문드러지지 않을 것이고 거짓된 사람은 반드시 문드러질 것이다’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탕에 던져져 데어 죽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또 키비씨吉備의 韓子(일본인이 현지처를 취하여 낳은 자식) 나다리那多利·사포리斯布利를 죽이고 인민을 괴롭혔으며 끝내 화해시키지 못하였습니다”라 아뢰었다. 이에 천황이 그 행실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불러 들였으나 오려고 하지 않았다. 도리어 카와치로 하여금 서울에 나아가 “신은 왕명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서울로 되돌아간다면 힘써 갔다가 헛되이 돌아가는 것이 되니 부끄러워 편안할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국명을 이루고 조정에 들어가 사죄할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라 아뢰게 하였다. 사자使者를 보낸 후 다시 스스로 꾀하기를 “그 쓰키調吉士(吉士, 키시)는 또한 황화皇華의 사자이니 만약 나보다 먼저 돌아가서 사실대로 아뢰면 나의 죄과는 반드시 무겁게 될 것이다”라 하였다. 이에 쓰키를 보내어 무리를 거느리고 이사지모라성伊斯枳牟羅城을 지키게 했다. 이에 아리사등阿利斯等은 (오미가) 사소한 일만 일삼고 맡은 바 임무에 힘쓰지 않는 것을 알고 귀조歸朝할 것을 자주 권했으나 오히려 돌아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배반하려는 마음이 생겼으므로 구례사기모久禮斯己母를 보내어 신라에 가서 청병請兵하고 노수구리奴須久利를 백제에 보내어 청병했다. 오미가 백제군사가 온다는 것을 듣고 背評(배평은 지명인데 또한 能備己富里라고도 한다)에서 맞아 토벌했는데 부상하거나 죽은 자가 반이었다. 백제는 노수구리奴須久利를 붙잡아 형틀을 채우고 쇠사슬로 묶어놓고 신라와 함께 성을 에워쌌다. 阿利斯等을 책망하며 꾸짖기를 “오미를 내줄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오미는 城에 의지하여 스스로 굳게 지켰으므로 사로잡을 수 없었다. 이에 두 나라는 편리한 곳을 찾아 한 달을 머물다가 성을 쌓고 돌아갔는데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이라 한다. 돌아올 때 길목의 등리지모라騰利枳牟羅·포나모라布那牟羅·모자지모라牟雌枳牟羅·아부라阿夫羅·구지파다지久知波多枳의 다섯 성을 쳐부수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는 오미의 행적이 별도의 저본에 의해서 수집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보입니다.(2) 오미가 위세를 떨치는 긍정적인 기록과 부정적인 기록이 섞여 있는데 아마 긍정적인 기록은 오미(근강)계의 전승을 참조하였을 것이고 부정적인 기록은 쓰키계 자료라 생각되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미계는 신라의 침탈을 막지 못한 이유에 대해 오미가 요충지를 지키면서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무산되고 신라가 무력을 행사해서라 하는 반면 쓰키계는 오히려 가야 지역을 혼란스럽게 해 재지세력이 오히려 신라의 개입을 청하게 되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백제가 신라의 멸망을 가야가 신라에 내응한 탓으로 보는 백제본기의 시각과 일치합니다.
(흠명 2년 - 541년) 탁기탄㖨己呑은 가라와 신라의 경계에 있어 해마다 공격을 받아 패배하였는데, 임나도 구원할 수가 없었고, 이로 말미암아 망하게 되었다. 남가라는 땅이 협소하여 불의의 습격에 방비할 수 없었고 의지할 바도 알지 못하여, 이로 인하여 망하였다. 탁순卓淳은 위아래 사람들이 다른 마음을 지녔는데, 군주가 혼자 항복하려고 신라에 내응하여, 이 때문에 망하게 되었다.(흠명 5년 - 544년) 무릇 탁국㖨國의 멸망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탁국의 함파한기函跛旱岐가 가라국에 두 마음을 품어 신라에 내응하고 가라는 밖에서 싸움으로써 이로 말미암아 망한 것입니다. 만일 함파한기로 하여금 내응하지 못하게 하였다면 탁국이 비록 작다 하더라도 반드시 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탁순의 경우에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만일 탁순국의 왕이 신라에 내응하여 적들을 불러들이지 않았다면 어찌 멸망에 이르렀겠습니까. 여러 나라가 패망하게 된 화근을 살펴 보면 모두 안에서 응하여 두 마음을 품은 자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오미가 일본에서 파견되었다는 것을 사실로 가정할 경우 오미가 탁기탄/남가라의 멸망 때문에 파견되었는지, 파견 이후 잘못된 대처로 신라의 가야 침탈을 막지 못했는지는 확정지을 수 없으나 탁기탄/남가라의 멸망 때문에 파견되었다고 한다면 적어도 김해는 532년에 멸망한 것으로 봐야하므로 기년 수정이 필요합니다. 계체 25년 기사에서 3년간의 기년 혼란 양상이 인정되므로 3년의 기년을 하향한다면 530년 오미가 파견되려고 하였으나 이와이의 난 때문에 지체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역시 530년에는 아직 김해가 멸망하지 않은 상태라 남가라의 멸망은 부정되므로 일단은 탁기탄의 멸망이 오미의 파견을 촉발하였으나 탁기탄을 복구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남가라의 멸망이 일어나게 되어 탁기탄/남가라 멸망 때문에 파견되었다라는 기록이 남은 것으로 봐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탁기탄은 적어도 530년 전에 멸망한 것이 되겠죠.
탁기탄에 대해서는 '1. 신라와 가라의 접경지역이다. 2. 소국이다.'라는 정보를 도출할 수 있습니다. 해당 지역으로는 영산·밀양, 창원 의창, 김해 진영 등의 설이 있으며(3), 경산시, 대구시, 의령군, 합천 쌍책면 설까지 존재하는 상황입니다.(4) 정황증거로는 어느 설이 유력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겠으나 기록상 금관金官(소나라須那羅)·배벌背伐(비지費智)·안다安多(다다라多多羅)·위타委陀(화다和多)가 동시에 입전되었는데 금관과 배벌은 김해와 창녕이며 오미가 군사적으로 패퇴한 배평 역시 배벌과 동일시 할 수 있다면 탁국은 나머지 두 지명에 비정되거나 이전에 복속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창녕과 김해가 복속되지 않은 상황에서 창원이나 의령을 공격하기는 어렵고, 대가야가 현풍을 점거하고 있었다면 합천은 접경지역으로 볼 수 없으므로 달성이나 창녕군 영산이 알맞다고 생각합니다. 임나가 탁기탄의 멸망으로 위기의식을 느끼는 점을 보았을 때 달성보다는 창녕 영산이 더 알맞은 위치라 하겠습니다. 탁순국을 창원으로 비정한다면 탁기탄국과 탁순국이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면서 탁(토쿠)이라는 동일한 음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이에 대해 과연 창녕읍과 창녕 영산이 별도의 정치체가 들어 있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는 합니다만 과거 영산은 창녕군에 속하지 않았던 행정구역이며 탁기탄이 소국이라는 것이라는 점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리하자면 탁기탄의 멸망-오미 케누를 파견-오미의 외교/군사 정책 실패-남가라 멸망과 신라의 낙동강 이서지역 점거/오미의 농성 순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신라가 가야에 본격적인 군사개입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앞서 언급한 신라인 종자의 송환 문제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일전에 대가야와 신라 사이에는 큰 충돌이 있었으나 백제의 대가야 서부지역 침탈로 신라와의 관계 개선을 꾀해 522년 국혼이 이루어졌습니다. 대가야가 국혼시 가야로 들어온 신라인을 각 가야지역에 분산 배치하며 신라의 의관을 그대로 입게 하였는데 이는 대가야의 친신라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행위라고 보입니다.(5) 이에 대해 반신라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아리사등阿利斯等이 종자를 쫓아낸 것이 외교적인 결례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에 신라는 대가야에게 혼인 동맹을 파기할 것인지를 회신한 것으로 보이는데 대가야의 사신 기부리지가가 혼인 상태를 유지할 것을 말했으므로 대가야는 반신라로 돌아서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리사등에 대해서 단일 인물의 인명인지 그 인물의 작호인지, 아니면 보통명사인지의 여부는 합의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5-8) 다만 일본서기에서 드러나는 아리사등의 행동은 꽤나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는데, 반신라적인 행보를 보이다가도 오미를 축출하기 위해 신라에 청병을 하며, 오미를 초빙했으나 다시 일본으로 보내고 싶어하며, 오미를 축출하기 위해 백제 군사를 불러 모았으나 백제와 대립하고 정황상 오미와 함께 농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일 인물이라면 오락가락하는 판단으로 자충수를 불러일으키는 천방지축의 인물로 봐야하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수장급 칭호의 하나라고 본다면 가야 각국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고 지리멸렬한 상황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미의 행동 역시 모순적인 면이 있습니다. 안라에서 속칭 고당회의를 개최할 때에 백제계 인사를 박대하고 있는데, 대인을 보내지 않은 신라 역시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웅천(지금의 진해)에 웅거한 다음에는 백제와 신라의 낮은 관위의 인사들이 왔을 때 칙을 선포하지 않겠다며 고위급 인사로 교체할 것을 요구하는데, 고위급 인사인 이사부가 병력 3천을 이끌고오자 웅천에서 임나의 기질기리성으로 들어간 다음 칙을 선포하지 않고 시간만 보내게 되어 결국 이사부가 군사행동을 하게 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런 사건의 흐름으로 볼 때 오미는 임나지역에서 백제와 신라의 간섭을 배제하려고 하였으며 고당회의는 이를 지지할 유력 인사들을 모은 회의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9) 임나의 지원을 받은 오미는 웅천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아마도 친신라, 친백제적인 성향을 가진 고위급 인사를 배제해 나간 것으로 추측됩니다. 금강이 웅천을 점거한 것이 금관국의 멸망 이전인지, 이후인지는 모호하나 만약 금관국의 멸망 이전이라면 점거 행위가 금관국을 위협, 신라로의 자진 귀부를 결심하게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혹은 이사부의 장기대로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으로 김해를 점거 후 다다라원에 진을 치고 오미와 대치했을 것입니다. 웅천에서 나와 임나의 기질기리성에 들어간 것은 군사적인 실패 이후 농성한 것으로 생각되며 일본서기는 백제군이 오미를 패배시켰다고 하나 전장이 낙동강 유역인 점, 신라는 상신 이사부가 개입했지만 백제는 그러지 못한 점을 볼 때 백제군이 오미를 비롯한 임나의 독자적인 움직임에 불쾌함을 표출하고 신라의 행보와 동행했을 수 있으나 주력은 신라군으로 봐야하겠습니다. 오미는 포로로 잡히지 않았으나 신라는 김해와 창녕을 점거하고 함안 북부(칠원?) 혹은 창원 북면 일대를 깨트려 가야권은 영토적으로 위축되었고, 백제는 걸탁성을 쌓아 임나 경내에 진주함으로써 정치적으로도 위축되는 사건으로 마무리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1. 호사카 유지·한성례 (2011), "게이타이 천황과 그 시대", '일본연구' 49, 113-131.
2. 정효운 (2007), "〈계체기〉사료에 관한 기초적 고찰", '일어일문학' 33, 321-335.
3. 남재우 (2012), "기록으로 본 고대 창녕지역의 정치적 위상", '석당논총' 53, 243-278.
4. 전덕재 (2011), "탁국(탁기탄)의 위치와 역사에 대한 고찰", 한국고대사연구 61, 261-299.
5. 이영식 (2013), "대가야와 신라, 혼인동맹의 전개와 성격", '역사와 세계' 44, 35-80.
6. 백승옥 (2014), "『일본서기』에 보이는 아라사등의 정체와 그의 외교활동", '한국민족문화' 51, 133-169.
7. 장인성 (2015), "가야 아리사등의 외교와 행적", '백제학보' 15, 5-27.
8. 정재윤 (2015), "아리사등 일라를 통해 본 6세기 한일 관계", '백제학보' 15, 53-78.
9. 이재석 (2014), "『일본서기』를 통해 본 안라국과 주변제국 - 특히 왜를 중심으로", '한국민족문화' 51, 171-211.
* 다다라원을 김해 서쪽 지방에 비정한 이유는 (선석열 (2011), "신라의 남부가야 진출과 일본열도 왜의 대응", '지역과 역사' 29, 59-84.)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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