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초기 기록 기년과 계통 문제(1) - 고구려 건국 신화와 역사성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서가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담담하게 서술하지 않은 이상 중립적이고도 사실적인 역사 기록은 환상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는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이 구전 집단으로 참여하여 전승하고 있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혼동이나 착오에 의해 의도치 않게 사건과 무관한 내용이 후에 첨가되거나 소실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일정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기억되고 싶은 내용을 의도적으로 첨삭되기도 합니다. 이는 고대의 역사는 응당 그러해야 하는 서사구조(내러티브)가 중요한 것이지 사건의 역사적인 선후 관계나 진실성은 부차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구려의 초기 왕계와 기년, 사건의 사실성 역시 학계에서 여러 층위에서 논의가 이루어졌고 카페에서도 여러 회원들이 이와 관련해 글을 작성한 바 있습니다. 이는 고구려가 만든 금석문(광개토대왕, 모두루묘지명)과 중국에서 채록한 기록, 국내 기록(삼국사기, 이규보 동명왕편, 삼국유사) 사이에서 일정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고구려의 건국 기록은 신화적인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그 신화의 내용은 고구려의 역사적 경험의 변용이 아니라 원래 다른 원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부여의 건국 신화는 "① 북쪽의 국가에서 출생 ② 신이한 방법으로 잉태됨 ③ 태어난 아이를 버렸더니 짐승이 범접하지 않음 ④ 장성하자 활의 명수가 됨 ⑤ 남쪽으로 도망가다가 큰 강을 만남 ⑥ 고기와 자라들이 임시 가교를 만들어주어 위기를 모면하고 결국 나라를 건국함"이라는 구성으로 되어 있는데 고구려의 건국에 관한 내용은 ①-⑥에서 완전히 동일한 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건국 신화를 기초로 앞 부분에는 해모수와 금와, 유화라는 다른 신화가 얹혀져 있고 뒷 부분에는 나라 만들기에 필요한 기반을 어떻게 획득하게 되었는지와 관련된 설명이(㉠ 인재의 등용 ㉡ 재지 유력자와 혼인 or 주변 유력자를 실력으로 복속) 덧붙어 있는 형태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원주(2009)

고구려 건국 신화에 부여의 건국 신화에 계속해서 흘러들어오고 있다는 것은 고구려의 건국을 이야기하고 있는 금석문의 내용이 후대로 갈 수록 부여의 그것과 비슷해져 간다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신이한 방법으로 임신된 아이를 버렸다가 기이한 일이 일어남을 보고 다시 거두어들였다는 플롯은 주나라 시조 후직이나 서언왕의 신화와도 연결고리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조우연(2010)

고구려 건국과 기록된 주몽의 연대 기년, 그리고 부여 출자와 관련해서 여러 불일치가 있다는 점은 많은 연구에서 지적된 바 있습니다. 문헌 면에서는 한서 지리지의 현도군의 속현 중에 고구려현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는 것이 있겠고, 고고학 면에서는 초기 고구려의 중심지임이 분명한 환인-집안 지역의 물질문화는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연속적으로 이어져 오는 곳으로 부여에서 기원한 이주민이 기원전 1세기 경에 이 지역의 헤게모니를 쥐거나 군림했다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건국 신화에서도 재지 유력자와 혼인해서 재지민을 포섭/타협했다고 볼 수 있다는 점과 초기 고구려 유적으로 보이는 망강루 고분에서 이질적인 문화의 흔적이 보인다는 것으로 부여계 이주민이 일부 이동해 왔고 곧 원 고구려인들에게 동화되었을 것으로 보는 절충적인 시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빼어난 자질을 가진 이방인 남성이 시합을 통해 왕을 제압하고 왕녀와 혼인함으로써 왕위의 정통성을 가져온다는 내용 역시 여러 신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구조이며, 소수의 이주민이 재지 세력의 비호를 받아 왕위에 나섰다고 하면서 스스로의 출자가 이질적인 집단임을 강조하는 전승을 꾸준히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모순되는 이야기라 하겠습니다.

부여 탈출의 역사성이 모호한 가운데 그 이후의 기사 역시 실제 있었던 일의 변용인지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마麻로 된 옷과, 누더기로 된 옷과, 물풀로 된 옷을 입고 있는 뭔가 계층의 느낌이 물씬 나는 재사, 무골, 묵거를 만나게 되는데 각각에게 성을 내려주며 스스로는 고구려 국명을 따서 고씨를 성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신라 박혁거세조의 성씨 사용과 유리 이사금조의 6부 성씨 사여를 믿을 수 없는 것처럼 고구려의 성씨 사용도 3세기까지는 제대로 정착되었다고 보기 힘든 대목이 있습니다. 고구려 유민 고질高質과 고자高慈의 묘지명에서는 그들이 고씨 성을 얻게 된 것이 밀우의 공에 대해서 (아마 동천왕이나 중천왕이)고씨 성을 내려줘서 고씨가 되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밀우가 원래 변변찮은 위치에 있어서 성을 가지지 못했다고 해석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임금을 최후까지 호송한 사람도 성을 가지지 못한 것을 볼 때 후대의 신라의 예와 마찬가지로 성의 사용이 보편적이지 않았으며 성씨 사여 역시 후대에 부회된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고구려 건국 신화에서 의미있는 역사적 사건을 추려내기 불가능하며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기원전 37년에 있었던 일임을 상고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고구려의 왕계와 계루부의 출자를 부여에서 찾는 것은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긍정한다 하더라도 최초의 전승 형태는 부여에서 왔다 정도에 지나지 않으며 나머지 부분은 점령한 북방 국가들의 신화와 왕계 정리 과정 중 귀족 집단의 전승이 침투하여 완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 논문

민경삼(2007), "신출토 고구려 유민 고질 묘지", '신라사학보' 9, 341-353.
박경철(2011), "부여의 국세변동상인식에 관한 시론", '고구려발해연구' 39, 9-46.
여호규(2011), "고구려 초기 적석묘의 기원과 축조집단의 계통", '역사문화연구' 39, 173-227.
임기환(2016), "고구려 건국전승의 시조 출자와 북부여, 동부여", '고구려발해연구' 54, 159-183.
장병진(2016), "고구려 출자 의식의 변화와 「집안고구려비」의 건국설화", '인문과학' 106, 210-239.
정원주(2009), "고구려 건국신화의 전개와 변용", '고구려발해연구' 33, 43-67.
조우연(2010), "고구려 시조신화에 나타나는 '부여출자'의 의미", '동아시아고대학' 22, 1-50.
하문식(2010), "혼강유역의 적석형 고인돌 연구", '선사와 고대' 32, 187-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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