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에도 관심을 - 가야연구 맛보기 (12) : 대가야의 성장

 반로국을 반파국의 기원으로 생각해 대가야를 3세기 이전에 건국한 집단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고고학적으로 대가야를 확정지을 수 있는 대가야 특유의 양식이 확립되는 것은 5세기 2/4 분기로 보입니다. 건국 신화에서는 대가야와 김해 구야국이 형제로 묘사되고 있으나 실제 역사를 반영한다고 보기는 어렵겠죠. 다만 가락국기의 6가야 설화보다는 현실을 약간 더 반영한 것으로 생각됩니다.(1) 국가의 성장과 문화의 발전에 따라 지역색이 등장하게 되니 대가야 양식의 초현기(初現期)는 그보다 좀 이른 시기로 잡아 보통 5세기 초, 혹은 약간 더 이른 4세기 극 후반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2) 이를 정치체의 발달 과정으로 파악한다면 대가야 정치체의 독립, 혹은 창건(중창?) 역시 그 즈음으로 파악할 수도 있을 겁니다.


고령 지역이 경제적으로/사회적으로 성장을 하게 됨에 따라 주변 지역에서도 고령 지역의 문화 영향을 찾아볼 수 있게 됩니다. 인근의 합천, 거창은 물론, 소백산맥을 넘어 전북 남원, 장수, 진안군에서도 대가야 토기가 출토되고 있으며, 섬진강 라인인 전남 곡성군, 구례군, 광양시, 그 너머 순천시와 여수시에서도 마찬가지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남강라인으로는 함양, 산청, 진주, 의령에서 출토되며 그 너머 고성과 창원에서도 출토 예가 있습니다.(2,3) 물론 이 모든 지역에서 동시기에 등장하는 것은 아니겠으며 대가야의 정치적 영향력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만 대가야의 교역권이 그 정도로 넓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가야 양식의 확장은 신라의 그것에 비해서 특이한 구석이 있습니다. 신라 양식과 진한의 관계는 하나의 교역 관계로 묶여서 비슷한 양식이 공유되고 있지만 재지 요소 역시 두드러지는 모습을 보인다고 합니다. 또한 진한 각 지역의 재지 수장급 묘지가 5세기 말까지 꾸준히 발전하는 것과 금석문 자료에서 6부 갈문왕들이 임금과 위세 차이가 별로 없다는 것을 통해 신라의 중앙집권 속도가 상당히 느리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가야 양식의 확장은 주변의 재지요소의 발달을 상당히 억제하거나 원래 재지요소를 축출하고 대가야 양식 일색을 만들어 버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등장 시기도 느리고 위세품 구비도 신라보다 못하지만 지역별 위세의 위계질서는 매우 잘 잡혀있어 상대적으로 빠른 국가 발전과 집중화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2,4)

하지만 대가야가 막 기지개를 킬 무렵은 느슨한 연합체이던 진한이 더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신라로 도약하고 있었고, 변한 지역은 대가야 이외의 지역체들도 동시기에 발전을 시작하고 있었던지라 대가야의 확장 방향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북쪽 성주는 원래 진한 지역으로 보이며 이미 신라의 영향력이 손을 뻗치고 있었고, 아래쪽 합천의 옥전고분군은 창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5-7) 그래서 대가야는 서남쪽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1. 백승충 (2006), "대가야의 건국과 성장", '한국학연구원 학술대회', 13-21.
2. 이희준 (2008), "대가야 토기 양식 확산 재론", '영남학', 13, 111-164.
3. 이한상 (2013), "대가야양식 유물의 분포양상과 의미", '신라문화', 41, 31-55.
4. 박천수 (2008), "고고학을 통해 본 대가야사", '퇴계학과 유교문화', 42, 5-52.
5. 김세기 (2014), "고분자료로 본 삼국시대 성주지역의 정치적 성격", '신라문화', 43, 1-27.
6. 이세영 (2007), "5~6세기 합천, 고령지역 고분문화 비교 연구", 동아대학교 석사학위논문.
7. 조재윤 (2012), "5~6세기 가야고분의 구조를 통해 본 지역성 연구",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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