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 초기 동인계 분당이 심한 이유?
구덕회 (1988), "선조대 후반(1594~1608) 정치체제의 재편과 정국의 동향", '한국사론' 20, 201-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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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옥사이후 동인 세력을 누르고 세력 확대를 꾀하다가 실세한 서인 세력은 임진왜란 초기 잠시 정계에 복귀할 수는 있었지만, 전란 수습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이들을 주도하던 정철의 사망과 성혼의 정계 은퇴에 따라 구심점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황정욱∙황혁 부자의 유배와 전란 중 의병 활동을 전개한 조헌∙양산숙∙고경명 등의 사망으로 공업功業의 면에서도 동인 세력에 비해 열세였고, 그들의 재지적 기반이 두어졌던 근기近畿 지역의 혹심한 전란 피해로 인해 정치적 실세를 면하지 못했다...
이러한 현실적인 입장에서 이이의 [조제보합론調濟保合論]의 영향을 받은 이들의 정치적 입장은 엄정한 시비∙정사正邪의 분별 보다는 이론異論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다른 붕당과의 공존체제를 유지하려 했고, 현실 문제의 해결에 노력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물론 서인 중에서도 이귀∙양홍주와 같이 적극적으로 북인 세력을 비판하면서 열세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보인 경우도 있었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들이 전란 후의 정국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이∙성혼의 학문적 기반이 넓었고, 그들의 재지적 기반이 두어졌던 근기지방이 당시 정치의 중심지였으므로 지속적인 세력확대가 가능하여 후에 인조반정도 성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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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동인은 그 구성원이 매우 다양했다. 이이∙성혼의 문인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 세력을 제외한 다수의 신진세력이 동인으로 불렸기 때문에 그 성격도 다양했다. 특히 이황과 조식 및 서경덕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한 사람이 주류였는데 그들은 사상적, 사회∙경제적 기반의 차이로 분기하게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이러한 차이가 뚜렷해져 확연히 분기하게 되었다...
당시의 남인 세력은 주로 이황의 문인을 중심으로 하면서 이에 동조하는 자들이며 경상좌도 지역의 재지적 기반 위에서 성장한 사람이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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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 세력중에서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남인 세력이 분기하자 나머지 사람들은 북인 세력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북인 세력은 구성원의 다기성多岐性과 사회∙경제적 기반의 차이를 내포하게 되고 학문적 전통도 약했다. 일반적으로 북인은 조식과 서경덕의 학통을 계승한 사람들이 중심이 된 것은 분명하나 서인이나 남인에 비해 학연學緣상의 순수성은 훨씬 떨어지는 편이라고 말해진다. 실제로 북인중에서 이산해가 서경덕의 문인인 이지함의 조카이자 제자이며, 이발과 정개청이 서경덕의 학통과 연결되었으며, 조식의 문인중에서는 정인홍과 최영경이 북인으로 지목되고 정인홍의 문인 중 일부가 북인으로 지목될 뿐이다. 이 외에는 대부분 이들과의 혈연∙지연∙인척 관계로 연결되거나, 이들에 의해 인진引進되거나, 이들의 현실 인식에 동조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논문의 간단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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