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로 시무 28조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김순자 (2006) - 10~11세기 고려와 요의 영토 정책
거란 침입 이전 고려의 북진의 한계선을 고려할 때 검토해야 할 기록은 최승로 상서문의 관련기록이다. 이 상서문은 성종 원년(982)의 구언교求言敎에 응해 제출된 것이므로 거란 침입 11년 전에 작성된 것이다. 최승로는 태조대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태조의 의도와 당시의 정책 등에 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였다. 선대 5朝의 치적治積을 평가한 다음, 강역 확정과 방위책을 건의하는 중에 최승로는“태조는 마헐탄馬歇灘을 경계로 정했고, 대조大朝는 압강변鴨江邊 석성石城을 경계로 정했다”고 하였다. 마헐탄은 고려사, 여지승람 등의 지지류에서 위치가 확인되지 않는 지명이다. ‘대조가 정한 압강변 석성’과 대조되어 서술된 문맥에서 이해할 때 압록강 일대는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태조 왕건이 국경을 어디까지로 설정하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고려의 영토 정책, 고려의 역사계승의식 등을 밝히는데 있어 중요하다. 태조대에 살았던 최승로의 발언이므로 태조대의 국경으로서 마헐탄은 절대적인 기준이다. 현재 전하는 지지류에서 가장 근사한 지명으로는 평양부平壤府 동쪽 40리에 있는 마탄馬灘을 들 수 있다. 또 하나의 국경으로 언급한 곳은 압록강변이다. ‘대조지소정大朝之所定’이란 성종 원년(982)에 이미 압록강을 고려의 국경선으로 공인해준 것이란 의미일 것이다. 여기의 대조는 당시 고려와 조공·책봉관계에 있는 중국왕조 송宋이거나 북중국의 거란, 혹은 성종 이전 고려왕 중에서 어느 왕일 것이다. 관련기록과 당시 국제정세를 고려해볼 때 여기의 대조는 송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와 직접 국경을 닿아있지 않고, 중국 대륙에서 거란에 군사적 열세에 있는 송이 인정한 국경선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감소하긴 하지만, 성종 초에 이미 고려인들은 영토 범위에 압록강선까지를 포함시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광종대까지 축성한 지역이 청천강 일대에 그쳤음을 생각해볼 때 영유권 행사 범위가 북으로 훨씬 확장된 것이라 하겠다.
허인욱 (2012) -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당시 고려인이 인식하는 영토의 범위는 982년에 최승로가 성종에게 올린 시무28조 중에 있는 기록을 통해 추정이 가능하다. 마헐탄으로 경계를 삼은 것은 태조 왕건의 뜻이었고, 압록강 변의 석성으로 경계를 삼은 것은 대조가 정한 바라는 언급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마헐탄과 압록강변 석성의 위치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최승로가 상서문을 올린 982년에는 대조가 정한 압록강까지를 고려가 자국의 영토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점은 충분히 인정된다.
그런데 영토획정의 주체인 대조가 누구를 지칭하는 가에 대해서는 견해가 나뉘고 있다. 고려의 임금인 경종이나 성종으로, 또는 송이나 거란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최승로가 상서문을 올린 982년 이전에 영토범위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면, 994년(성종 13년) 서희와 소손녕이 경계를 획정할 때에 이와 관련된 언급이 반드시 거론되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거란을 지칭할 확률은 매우 낮다. 아울러 대조라는 표현이 있는 상서문의 1조를 보면. "以西北隣於戎狄"라고 하여 거란과 여진에 비우호적인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거란을 '대조'로 표현했다고 받아들이기는 사실 어렵다. 따라서 대조가 거란을 가리킬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중국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는 『국역 동문선』에서 유래되었다. 중국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고려의 영역을 정하는 주체를 중국으로 이해하는 것은 순리에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조선시대 기록인 『홍재전서』에 대조가 자기가 사환仕宦하는 국왕을 가리키는 용례로 쓰인 것을 참고하여, 최승로가 상서문을 제출하던 당시의 국왕인 성종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고려의 영역을 정하는 주체를 고려로 이해하려는 의도는 충분히 수긍이 간다.
하지만, 성종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상서문에서 성종을 '성상聖上'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앞서 언급한 『홍재전서』에서 대조와 소조가 각각 아버지인 영조와 아들인 사도세자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조는 성종의 윗대인 경종 또는 광종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좀 더 타당하다. 한진서는 『海東繹史續해동역사속』에서 "대조는 경종을 지칭한다. (경종은) 광종의 아들이며 성종의 형이다."라고 하여 경종으로 본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서희의 언급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서희는 거란이 침입해 오자, 성종에게 "거란의 동경으로부터 우리나라의 안북부에 이르는 수백 리의 땅은 모두 생여진에게 점거되었는데, 광종이 이를 빼앗아 가주嘉州·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았습니다. 지금 거란 군사가 쳐들어 온 것은 그 의도가 이 두 성을 빼앗으려는 데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라는 말을 하였는데, 이는 광종대 가주와 송성까지 영토 개척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대조는 경종보다는 광종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인 태도이다. 즉, 최승로가 상서문에서 압록강 석성을 경계로 삼았다고 표현한 대조는 광종을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된다.
신안식 (2002) - 고려전기의 북방정책과 성곽체제
최승로의 '시무28조'에서는 고려와 거란의 영역적 경계가 제시되어 있다. 그는 "마헐탄으로써 경계를 삼은 것은 태조의 뜻이고, 압록강가의 석성으로써 경계를 삼은 것은 대조의 정한 바입니다"라고 하여 고려와 거란의 변경으로 마헐탄과 석성을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이 두 지역의 위치 비정이 중요한 관건일 것이다. 마헐탄의 위치는 압록강으로 일찍이 비정되었다가 이후 청천강일 것이라는 견해들이 제시되었고, 후자의 견해가 유력하게 받아들여지는 형편이다. 석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함원진咸遠鎭은 현종 20년에 유소柳韶를 보내어 옛 석성을 수리하여 이를 설치하였고, 진은 흥화진의 서북에 있다."라는 것과 운중도雲中道의 참역站驛 중에 석성(평로진) 등의 사례가 있다. 평로진은 북계지역이긴 하지만 동북쪽에 가까운 지역이었고, 함원진은 압록강 유역의 의주와 가까운 지역이다. 따라서 석성이 고려와 거란의 경계였음을 고려하면, 석성은 함원진이 아니었을까한다.
태조가 경계로 삼았다는 마헐탄이 어디였는가는 고려초기의 변경의식을 이해할 수 있는 지역적 근거가 된다. 그런데 태조대의 성곽분포가 청천강 이남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마헐탄과 청천강을 연관시킨 것은 재고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태조대의 변경의식이 청천강으로 고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 왕창근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었듯이, 고려왕조의 변경의식에는 압록강이 중요한 지역적 근거로 상정되고 있었다. 또한 마헐탄과 석성이 거란의 남방 경계선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어렵다. 이런 문제에서 고려될 수 있는 사항은 고려전기의 과려와 거란의 관계에서 여진족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과 앞서 최승로의 견해는 다분히 외교적 수사가 내재되었을 것이라는 점 등이다. 즉, 최승로의 주장은 압록강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고려와 거란의 변경의식이 언제든지 충돌할 수 있었음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광종대의 성곽축조는 고려왕조가 지향했던 북방정책의 구현인 동시에 흥화도·운중도·삭방도 등 거란·여진과의 경계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척할 필요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이 곧 대외관계에서 거란과의 충돌을 일으키는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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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 국경 의식과 지역 비정과 관련한 논문들이니 보고 참고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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