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에도 관심을 - 가야연구 맛보기 (24) : 종말의 앞에서

 낙동강과 마산만을 잇는 경남 중심선의 동쪽이 신라의 압박을 받게 되자 가야 각국의 위기감은 고조되었습니다. 이에 동쪽의 위기를 막기 위해 앞서 서쪽의 위기를 불러왔던 백제와 다시금 손을 잡으려고 합니다.


(흠명 2년 - 541년) 여름 4월 안라의 차한기 이탄해次旱岐夷呑奚·대불손大不孫·구취유리久取柔利등과 가라加羅의 상수위上首位 고전해古殿奚, 졸마卒麻의 한기旱岐, 산반해散半奚의 한기旱岐의 아들, 다라多羅의 하한기下旱岐 이타夷他, 사이기斯二岐의 한기旱岐의 아들, 자타子他의 한기旱岐 등이 임나의 일본부의 키비吉備臣와 더불어 백제에 가서 함께 조칙詔勅을 들었다. 백제百濟의 성왕聖明王이 임나의 한기旱岐들에게, "일본의 덴노가 명령한 바는 오로지 임나를 재건하라는 것이다. 지금 어떤 계책으로 임나를 다시 일으키겠는가. 어찌 각기 충성을 다하여 덴노의 마음을 받들어 펼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임나의 한기 등이, "전에 두세 번 신라와 더불어 의논하였으나 대답이 없었습니다. 도모하려는 뜻을 다시 신라에 이른다 하여도 여전히 대답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 마땅히 함께 사신을 보내어 덴노에게 아뢰어야 합니다. 임나를 재건하는 일은 대왕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공경하게 (왕의) 교지敎旨를 받드려 하는데 누가 감히 다른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임나의 경계는 신라와 접해 있어서 탁순卓淳 등과 같은 화를 입을까 두렵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성왕은, "옛적에 우리 선조 근초고왕速古王, 근구수왕貴首王의 때에, 안라安羅·가라加羅·탁순卓淳의 한기旱岐 등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고 서로 통교하여 친교를 두터이 맺어, 자제子弟의 나라로 여기고 더불어 융성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지금 신라에게 속임을 당하여 덴노를 노엽게 하고 임나를 한에 사무치게 한 것은 과인의 잘못이다. 나는 깊이 뉘우쳐 하부下部 중좌평中佐平 마로麻鹵, 성방城方 배미노背昧奴 등을 보내어 가라에 나아가 임나의 일본부에 모여 서로 맹세하게 하였다. 그 후에도 계속 마음을 두고 임나를 재건하려고 하는 일을 아침 저녁으로 잊은 적이 없었다. 지금 덴노가 명령을 내려, '속히 임나를 재건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로 말미암아 그대들과 함께 계책을 모의하여 임나 등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니, 잘 생각하여야 한다. 또 임나의 경계에서 신라를 불러, (조詔를) 받들 것인가의 여부를 물어야겠다. 함께 사신을 보내어 덴노에게 아뢰고 삼가 교시를 받들자. 만일 사자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신라가 틈을 엿보아 임나를 침략해 오면 나는 마땅히 가서 구원할 것이니 근심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잘 방비하고 삼가 경계하기를 잊지 말라. 또한 그대들은 말하기를, 탁순 등과 같은 화를 입을까 두렵다고 하였으나, (그것은) 신라가 혼자 강하다고 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탁기탄㖨己呑은 가라와 신라의 경계에 있어 해마다 공격을 받아 패배하였는데, 임나도 구원할 수가 없었고, 이로 말미암아 망하게 되었다. 남가라는 땅이 협소하여 불의의 습격에 방비할 수 없었고 의지할 바도 알지 못하여, 이로 인하여 망하였다. 탁순은 위아래 사람들이 다른 마음을 지녔는데, 군주가 혼자 항복하려고 신라에 내응하여, 이 때문에 망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살펴보니 삼국三國의 패망은 진실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옛적에 신라가 고려에 구원을 청하여 임나와 백제를 쳤으나 오히려 이기지 못하였는데, 신라가 어찌 혼자서 임나를 멸망시키겠는가. 지금 과인이 그대들과 더불어 힘을 다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덴노에게 의지하면 임나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물건을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기뻐하며 돌아갔다.

(흠명 4년 - 543년) 12월 (百濟가) 시덕施德 고분高分을 보내어 임나의 집사執事와 일본부의 집사를 불렀다. 모두, “정월 초하루를 지내고 가서 듣겠다”라고 대답하였다.

(흠명 5년 - 544년) 1월 백제가 또 사신을 보내어 임나의 집사와 일본부의 집사를 불렀다. 일본부와 임나가 모두 집사를 보내지 않고 지위가 낮은 사람을 보냈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가 임나국을 세울 것을 함께 모의하지 못하였다.

11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일본부 오미臣와 임나 집사執事를 불러, "덴노에게 조알하기 위하여 보낸 나솔 득문得文·나솔 허세기마許勢奇麻·나솔 물부기비物部奇非 등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다. 이제 일본부 오미臣와 임나국 집사執事는 마땅히 와서 칙勅을 듣고 함께 임나의 문제를 논의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일본의 키비吉備臣, 안라의 하한기下旱岐 대불손大不孫과 구취유리久取柔利, 가라의 상수위上首位 고전해古殿奚, 졸마군卒麻君, 사이기군斯二岐君, 산반해군散半奚君의 아이, 다라多羅의 이수위二首位 흘건지訖乾智, 자타子他 한기旱岐, 구차久嗟 한기旱岐가 이에 백제에 나아갔다...

가만히 듣건대 신라·안라 두 나라 사이에는 큰 강이 있어 적을 방비하기 좋은 곳이라 한다. 내가 이를 차지하여 6성을 수축하려고, 삼가 덴노에게 3천 병사를 청하여 매성마다 5백 명씩 배치하고 아울러 우리 병사들이 (신라인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지 못하도록 하려는데, 걱정스러운 것은 구례산久禮山의 5성이 거의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였다는 점이다. 탁순의 나라 또한 다시 부흥시켜야 할 것이니, 청한 병사는 내가 옷과 식량을 지급할 것이다. 이를 덴노에게 주청하고자 하는 계책이 첫째이다. 오히려 남한南韓에 군령郡令과 성주城主를 두는 것이 어찌 덴노를 거스려 조공貢調의 길을 차단하고자 하는 것이겠는가. 다만 바라는 바는 많은 어려움을 이기고 강적(고구려)을 물리치는 것이니, 무릇 그 흉칙한 무리들이 누구인들 부용하려고 꾀하지 않겠는가. 북쪽의 적(고구려)은 강대하고 우리나라는 미약하니, 만일 남한南韓에 군령郡令·성주城主를 설치하여 방호시설을 수리하지 않는다면 이 강적을 방어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신라를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이들을 두어 신라를 공격 핍박하여 임나를 위로하고 휼문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멸망을 당해 조빙할 수 없을까 두렵다. 이를 덴노에게 주청하고자 하니 그 책략의 둘째이다. 또 키비吉備臣·카와치노 아타이河內直·에나시移那斯·마쓰麻都가 오히려 임나국에 있기 때문에, 덴노가 비록 조를 내려 임나를 세우라 하였으나 이를 시행할 수 없었다. 이 4명을 옮겨 각각 그 본읍本邑에 돌려보낼 것을 덴노에게 아뢰어 청하는 것이 그 계책의 셋째이다. 마땅히 일본 오미臣·임나 한기 등과 더불어 모두 받들어 사신을 보내어 함께 덴노에게 아뢰고 은혜로운 조詔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키비吉備臣와 한기旱岐 등이, "대왕이 말한 세 가지 책략은 또한 우리의 뜻과 같을 뿐입니다. 이제 돌아가 일본의 대신, 안라왕·가라왕에게 공경히 아뢰고 모두 사신을 보내어 함께 천황에게 주청하기를 원합니다. 이는 진실로 천 년에 한 번 올 정도의 기회로, 깊이 생각하고 자세히 계획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

처음에는 백제가 뜨듯 미지근한 반응을 보인 것처럼 보입니다. 신라가 단독적으로 가야를 순식간에 석권하지 않을 것으로 보아 적극적이며 즉각적인 개입을 하지 않고 내부 단속을 먼저 할 것을 주문하였는데 고구려를 의식하여 신라를 견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보입니다. 2년 후 백제가 적극적으로 가야에 접근하려고 하나 가야가 거부하다가 544년 다시 회동을 갖고 백제가 제시한 안을 가야가 수용하였다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541년에 그러했듯이 544년에도 앞에서만 백제에 찬동하고 돌아가서는 독자적인 행보를 유지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일본서기의 가야 기사는 562년의 멸망기사를 제외하고는 이것이 마지막이라 어떻게 되었는지는 확정적이지는 않습니다. 다만 후기 대가야의 물질문화에 백제의 영향력이 나타난다는 점과(1) 소가야 권역의 독자적인 물질문화가 쇠퇴하고 대가야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게 된다는 점을(2-5) 토대로 대가야가 주도적으로 친 백제 외교 노선을 이끌고 백제가 대가야를 통해 가야를 간접 지배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6)

1차 회의와 2차 회의의 참가국가는 거의 같으나 고성으로 비정되는 고차(구차)국이 추가된 것을 볼 수 있고, 몇몇 국가의 수장 칭호에 변동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를 부체제에 포함되는 과정이라 적극적으로 해석한 경우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7) 사비회의가 가야권역의 일괄적인 정치 위계 재편의 불씨를 당겨, 위계가 높은 고령 대가야와 합천 다라국, 함안 안라국을 중심으로 지역별 소국들이 정리되어 나가는 양상을 고구려의 부체제나 신라의 6부제 등장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여지가 있겠습니다.

대가야의 가야 권역 통합 의지에 대해서는 우륵 12곡의 작곡과 곡명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잡지雜志) 신라고기(新羅古記)에서 이르기를 “가야국의 가실왕嘉實王이 당唐의 악기를 보고 만들었다. 왕이 '여러 나라의 방언이 각기 다르니 음악이 어찌 한결같을 수 있겠는가.' 하며, 이에 성열현(省熱縣) 사람 악사 우륵于勒에게 12곡을 만들게 하였다. 

우륵이 지은 12곡은 첫째 하가라도下加羅都, 둘째 상가라도上加羅都, 셋째 보기寶伎, 넷째 달이達已, 다섯째 사물思勿, 여섯째 물혜勿慧, 일곱째 하기물下奇物, 여덟째 사자기師子伎, 아홉째 거열居烈, 열째 사팔혜沙八兮, 열한째 이사爾赦, 열두째 상기물上奇物이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

12곡의 곡명이 모두 대가야 지역의 지명과 관련이 있는지, 실제로 대가야에 복속되어 있던 지역인지, 관련이 있다면 어느 지역에 비정될 수 있는지는 연구자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정치적인 요소에 매몰되어 곡명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음악 그 자체로 보아야 한다는 비판 역시 이루어진 바 있습니다.(8) 이에 유의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상가라도가 대가야의 본거지인 고령을 의미한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상-하의 위계도 위계려니와 고령 북쪽으로는 대가야가 진출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가라도 역시 대가야의 권역으로 본다면 합천군 봉산면 일대의 고총 지역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거열은 대부분 거창으로 봅니다. 이외의 곡명은 음상사라는 희미한 근거만이 있는 형편입니다. 보기와 사자기는 대부분 지역명이 아니라고 봅니다만 역시 알 수 없습니다. 음상사로 지역을 가져다 붙인다면 달이는 임나4현 기사의 다리의 이표기로, 상하기물은 상하기문의 이표기로, 사물은 포상팔국의 사물국의 이표기로, 물혜는 모루의 이표기로 보는 정도입니다. 사물이 사물국으로 사천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대가야가 육로로 사천시를 점거했을 가능성보다는 늑도나, 남해 창선도를 점유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합니다. 6세기 초에 백제의 권역이 된 것으로 보이는 전남 동부 지역으로 볼 수 있는 지역이 주로 나오고 있어 우륵이 작곡한 시기가 그 이전이든지 혹은 이미 대가야에서 이탈한 지역이지만 강한 수복의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해석됩니다.


(9)

(흠명 23년 - 562년) 봄 정월 신라가 임나 관가官家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어떤 책에서는 21년에 임나가 멸망하였다고 한다. 통틀어 말하면 임나이고, 개별적으로 말하면 가라국加羅國, 안라국安羅國, 사이기국斯二岐國, 다라국多羅國, 졸마국卒麻國, 고차국古嵯國, 자타국子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 걸찬국乞湌國, 임례국稔禮國)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그러나 행동을 함께한 이 국가들은 가야가 멸망하기까지 완전히 하나의 국가가 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야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541년과 544년의 회동에 참여하지 않은 가야 국가(걸찬국, 임례국)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위세가 낮아서 참여하지 못했거나, 신라의 공세에 노출되지 않아 위기 의식을 느끼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대가야의 영향력이 서북쪽에서 소가야를 잠식해 들어오는 것을 볼 때 걸찬국과 임례국은 소가야 권역의 남동지역인 고성 내산리나 통영지역의 소국일 가능성이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국가인 사이기국, 다라국, 졸마국, 자타국, 산반하국의 영역은 대가야 영역과 안라국의 함안, 고차국의 고성을 제외한 경남 서부 지역에 비정될 수 있겠습니다. 고분군과 음상사에 따라 다라는 합천군(쌍책면 다라리)에 산반하는 의령군 부림면(신반)에, 사이기는 합천군 삼가면에 임의로 비정하였습니다. 자타의 경우 진주의 옛 이름이 거타居陁였다는 것에 따라 진주로 비정하는 분들이 있으나 자타와 거타를 잇는 것은 어렵다고 보고 역시 임의로 산청군(차탄리)에 그려 놓습니다.

1. 정호섭(2014), "가야 고령 고아동 벽화고분의 조영과 성격", '선사와 고대' 40, 165-188.
2. 김규운(2009), "고고자료로 본 5~6세기 소가야의 변천", 경상대학교 석사학위논문.
3. 임연주(2012), "소가야식 이단교호투창고배의 출현과 전개", '경남연구' 7, 66-91.
4. 김지연(2013), "소가야양식 토기의 연구", 부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5. 하승철(2015), "소가야의 고고학적 연구", 경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6. 김병남(2012), "백제의 가야 진출과 '사비회의'", '백제연구' 55, 251-272.
7. 이형기(2015), "합천·의령 지역의 가야 세력", '한국고대사탐구' 20, 45-74.
8. 김세종(2008), "우륵 12곡의 신고찰", '예술논집' 8, 27-48.
9. 백승옥(2010), "변·진한 및 가야·신라의 경계 : 역사지도의 경계 획정을 위한 시고試考", '한국고대사연구' 58, 6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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