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5'가 중요하다.

 수(數)는 생각할수록 특이하고 오묘합니다. 돌이켜 생각했을 때 어떻게 하나-둘-셋-..으로 이어지는 순차적인 연쇄를 이해하게 되었는지 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습니다. 숫자가 가지는 특성을 좇아 피타고라스 학파와 수비數秘학이 생겼으며 현재의 정수론으로 이어지게 되는 양상을 보면 고대로부터 수가 사람을 끄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지 않았을까요.


숫자가 오묘한만큼 수를 가리키는 어휘도 오묘한 맛이 있습니다. 수를 가리키는 어휘는 수사(數詞, numeral)라고 불리는데 독립적인 품사로 인정할 수 있는지 아닌지가 학술적으로 애매한 상태입니다. 체언으로 사용되는 것은 분명하나 다른 명사를 수식할 수 있고, 실체를 가리키는 명사와 달리 고유 대상을 지칭하지 못해 대명사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나 어느 특정 대상을 직접적으로 지시하며 상황에 따라 대상이 달라지는 대명사와 달리 항상 고유한 특성을 가리키는 명사적 특징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품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체언 아래 명사 아래 수사라는 분류군에 포함되는 일련의 어휘들이 있습니다.
(조규태, 2006)

소/말의 나이, 기수사, 수관형사, 10단위수, 날수 명사, 합성 수사 사이를 비교해서 한국어 원原 수사의 형태를 재구하는 것도 학문적으로 의미있는 일입니다만 이 수사가 어떠한 기작으로 우리의 어휘 목록에 들어오게 되었는가도 또한 흥미를 끄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한대의 숫자를 다룰 수 있지만 처음부터 수사 어휘 목록을 완비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계 여러 문화권의 언어에서 수사가 미처 다 완비되지 못한 경우를 찾을 수 있는 것에서 인류가 말을 하기 시작할 시점에는 아직 우리는 수를 다룬다는 개념이 발생하지 못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1에서 4에 해당하는 수와 그 이후의 수들의 발생 원리가 다르다는 것에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연구가 많이 된 인도-유럽어족의 경우 1-4 사이의 어휘는 형용사형 어휘가 따로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한국어에서도 1-4 사이의 어휘는 상황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지만 5 이후의 어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최근 호주 어보리진의 Pama-Nyungan 어족을 대상으로 수사 비교 연구를 한 논문이 나왔습니다. 분화가 일어나기 이전에 이미 수사 목록을 갖춘 인도-유럽어족이나 한장어족이나 수사가 보존되어 있지 않아 수에 대한 개념이 등장하기 이전에 분화된 것으로 여겨지는 아프리카아시아어족에 비해 Pama-Nyungan 어족은 1만년에서 6500년 전 사이에 분화가 시작되었다고 여겨지며 비록 이미 절멸했거나 절멸위기에 처해 있지만 300개가 넘는 언어를 포함하고 있는 거대 어족입니다. 이 어족에서 수사 형태 변천을 추적한 결과 시기에 따라서 순차적으로 수사 어휘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휘를 소실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흐른다고 모든 문화권이 수사를 완비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개념을 고안하게 만드는 사회 내부의 요인이나 동인이 있어야 합니다.

3과 4를 가리키는 어휘에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수사 어휘가 생성될 때에는 3의 경우 2+1, 4의 경우 2+2, 5의 경우 손을 가리키는 어휘에서 파생되거나 3+2를 뜻하는 말에서 파생되는 것을 통해 인류가 어떤 식으로 수사를 만들어 나가게 되었는지 유추할 수 있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수사가 소멸될 때에는 4가 소멸하고 3이 소멸되는 경우는 있어도 4는 남아 있지만 3 어휘가 소멸되었다가 재생성된 경우는 없었습니다.

놀라운 일은 4에서 수사 어휘 목록이 멈추는 경우는 있어도 5에서 멈춘 언어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10이나 20까지 숫자 어휘가 구비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5의 개념을 깨우치게 되었다면 순식간에 10, 20까지 무더기로 확장되어 나간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한국어의 경우 50 단위까지 별개의 어휘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때 확장이 50까지 이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죠.


참고문헌
조규태 (2006), "한국어 수사의 어원과 어형 변화에 대하여", '어문학' 94, 81-117.
김인균 (2008), "국어의 수사 범주론", '한국어학' 39, 1-39.
박교식 (2008), "한국어 수사의 어원에 관한 수학사적 조망: 하나에서 열까지", '한국수학사학회지' 21, 97-112.
K Zhou and C Bowern (2015) - Quantifying uncertainty in the phylogenetics of Australian numeral systems, PRSB.
M Erard (2015) - How societies learn to count to 10, 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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