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에도 관심을 - 가야연구 맛보기 (23) : 탁순국의 멸망
금관국과 탁기탄국을 병합한 신라는 그것으로 멈출 생각이 없었습니다.
(계체 25년 - 531년) 3월에 군대가 나아가서 안라에 이르러 걸탁성乞乇城을 쌓았다.(선화 2년 - 537년) 겨울 10월 임진壬辰 초하루 신라가 임나를 침략하였으므로 오토모 카나무라大伴金村大連에게 명령하여 그 아들 이와磐와 사테히코狹手彦를 보내어 임나를 돕게 했다. 이 때 이와磐는 쓰쿠시筑紫(현재의 후쿠오카)에 머물며 국정國政을 잡고 삼한三韓에 대비하고 있었다. 사테히코는 가서 임나를 평정하고 또 백제를 구원했다.(추고 8년 - 540년, 1갑자 인하) 봄 2월 신라가 임나와 더불어 서로 공격하자, 천황이 임나를 구원하고자 하였다. 이 해 사카이베境部臣를 대장군으로 삼고 호즈미穗積臣를 부장군으로 삼아 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임나를 위하여 신라를 치도록 명하였다. 이에 곧바로 신라를 향하여 바다를 건너갔다. 신라에 이르러 5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이에 신라왕이 두려워하여 흰 기를 들고 장군의 깃발 아래에 이르러 서서 多多羅·素奈羅·弗知鬼·委陀·南迦羅·阿羅羅 6城을 떼어 주며 항복을 청하였다. 그 때 장군이 함께 의논하여, "신라가 죄를 알고 항복하니 억지로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 하고, 곧 (덴에게) 아뢰었다. 천황이 다시 키시吉師 나니와노 미와難波神를 신라에 보내고, 또 키시吉士 나니와노 키쓰이타비難波木蓮子를 임나에 보내어 일의 상황을 살피도록 하였다. 이에 신라·임나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조調를 바치고, 표表를 올려 "하늘에는 신神이 있고 땅에는 덴노가 있으니, 이 두 신을 제외하고 또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앞으로는 이후로 서로 공격하지 않겠으며, 또 배와 노를 마르지 않도록 해마다 반드시 조공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덴노가) 곧 사신을 보내어 장군을 불러 들였다. 장군들이 신라로부터 이르자, 신라가 또 임나를 침략하였다.(흠명 원년 - 540년) 여러 신하에게 "어느 정도의 군사가 있으면 신라를 칠 수 있겠는가"하고 물었다.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大連尾輿 등이, "적은 군사로는 쉽게 칠 수 없습니다. 지난 번 오도노스메라미코토男大迹天皇(계체) 6년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임나의 상다리上哆唎·하다리下哆唎·사타娑陀·모루牟婁의 네 현縣을 청하였는데, 오토모大伴大連金村가 표에서 청하는 대로 구하는 곳을 내려 주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의 원망이 여러 해 동안 쌓여 갔으니 가볍게 칠 수 없습니다"라고 아뢰었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
탁기탄국과 남가라(금관국)이 멸망하자 백제는 안라 경내에 걸탁성을 쌓고 진주하였는데 6세기 진주 수정봉, 옥봉 고분군이 성장하고 내부에 백제계 유물이 다량 부장되는 것이 이 사건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1) 아마도 신라의 추가 진출을 억제하고 안라를 돕는다는 명분이었을 것입니다. 경남 서부 지역이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는 것은 추가적인 외교적/군사적인 문제를 불러왔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본서기의 기록 혼란 양상이 있으므로 600년대에 이미 없어진 임나와의 충돌을 기록한 내용은 1갑자를 인하해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안한과 선화가 실제 존재하지 않은 인물이며 흠명이 계체를 바로 이은 덴노로 보이므로 기년 수정이 더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2) 추고 8년 등의 일본서기다운 엉뚱한 기사를 다른 기록과 연동하여 해석하자면 530년-540년 사이에 계속해서 신라와 임나지역 사이에 군사적인 충돌이 있었고 일본은 임나를 정신적으로 지지했습니다만 실질적인 도움은 되지 못한 모양입니다.
(추고 9년 - 541년, 1갑자 인하) 3월 갑신甲申 초하루 술자戊子 오토모노 무라지쿠이大伴連喫를 고구려에 보내고, 사카모토노 오미아라테坂本臣糠手를 백제에 보내어 "급히 임나를 구원하라"고 조를 내렸다.겨울 11월 경진庚辰 초하루 갑신甲申 신라를 칠 것을 의논하였다.(흠명 2년 - 541년) 탁기탄㖨己呑은 가라와 신라의 경계에 있어 해마다 공격을 받아 패배하였는데, 임나도 구원할 수가 없었고, 이로 말미암아 망하게 되었다. 남가라는 땅이 협소하여 불의의 습격에 방비할 수 없었고 의지할 바도 알지 못하여, 이로 인하여 망하였다. 탁순은 위아래 사람들이 다른 마음을 지녔는데, 군주가 혼자 항복하려고 신라에 내응하여, 이 때문에 망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살펴보니 삼국三國의 패망은 진실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옛적에 신라가 고려에 구원을 청하여 임나와 백제를 쳤으나 오히려 이기지 못하였는데, 신라가 어찌 혼자서 임나를 멸망시키겠는가. 지금 과인이 그대들과 더불어 힘을 다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덴노에게 의지하면 임나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바야흐로 지금 임나의 경계는 신라와 접하고 있으니, 항상 방비를 하여야 한다. 어찌 경계를 게을리할 것인가.(흠명 5년 - 544년) 신라는 (아마도 541년) 봄에 탁순㖨淳을 취하고 이어 우리의 구례산久禮山 수비병을 내쫒고 드디어 점유하였습니다. 안라에 가까운 곳은 안라가 논밭을 일구어 씨를 뿌렸고, 구례산久禮山에 가까운 곳은 신라가 논밭을 일구고 씨를 뿌렸는데, 각각 경작하여 서로 침탈하지 아니하였습니다.가만히 듣건대 신라·안라 두 나라 사이에는 큰 강이 있어 적을 방비하기 좋은 곳이라 한다. 내가 이를 차지하여 6성을 수축하려고, 삼가 덴노에게 3천 병사를 청하여 매성마다 5백 명씩 배치하고 아울러 우리 병사들이 (신라인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지 못하도록 하려는데, 걱정스러운 것은 구례산久禮山의 5성이 거의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였다는 점이다. 탁순의 나라 또한 다시 부흥시켜야 할 것이니, 청한 병사는 내가 옷과 식량을 지급할 것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신라의 진출로 가야 지역은 위기가 고조되었고 아마도 임나 지역의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인 역량을 하나로 모아야할 필요성을 증대시켰을 것입니다.'일본서기'상으로는 임나 지역의 외교적인 정책을 맡은 것으로 보이는 임나일본부라고 하는 것이 이미 흠명 2년에는 등장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일전의 근강모야(오미노 케누)와 안라국주가 참여한 고당회의의 계승물인지는 불분명합니다만 그 때의 경험이나 전례가 반영되었을 테지요.
541년과 544년의 기록으로 탁순국이 멸망한 년도를 산출하기 어려운데 흠명 2년에 이미 탁순은 멸망한 상태임을 알 수 있으나 흠명 5년 기록에는 탁순국이 봄에 멸망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봄 앞에 기년이 생략되었다고 가정한다면 탁순국의 멸망은 541년 이전이 되겠습니다. 이 기년이 맞다면 신라는 매우 적극적으로 임나를 밀어붙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540년에 법흥왕이 사망하고 진흥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는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팽창 정책을 지속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탁순국은 대구, 창원, 의령설이 있습니다만 현재는 창원설이 유력한 상태입니다. 이는 창원이 왜와의 교류가 빈번했던 곳이였기 때문이며, 기록상 탁순은 신라와 경계를 마주하는 곳이며, 탁순이 점령당한 다음 안라와 신라가 경계를 마주하게 되었으므로 의령보다는 창원이 알맞은 지역이라는 논리입니다.(3) 덧붙여 의령군은 과거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편재되지 못했으며, 고고학적 양상을 보았을 때 북부는 대가야권에, 남동부는 안라권에, 진주와 가까운 서부는 소가야의 영향권으로 나뉘어져 있었다는 것도 의령을 하나의 단일 정치체로 비정하는 것을 곤란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창원지역의 고고학적인 양상을 살펴보면 구(舊) 창원지역인 가음정동, 적현동, 삼동동, 도계동 일대의 고분군이 김해 금관국의 영향력 아래에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김해의 영역권의 지표인 외절구연고배까지 나오며 지리적으로도 매우 가깝기 때문에 금관국의 영역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김해는 4세기말/5세기 초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결정적인 타격을 받으며 김해권의 한 축인 부산 복천동 집단이 신라에게 복속되는 참사가 벌어집니다. 이 때 창원 역시 김해의 세력권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5세기에는 아라가야계, 소가야계, 신라계 유물이 고루 등장하는 것을 볼 때 독립적인 소국으로 지리적인 이점을 내세워 남강과 낙동강, 남해안의 교차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되나 6세기에 들어서서 대가야계 일색의 유물 양상을 보여줍니다.(4) 신라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서 정치적으로 대가야의 권역으로 들어간 것을 반영하는 양상으로 생각됩니다. 성왕이 탁순이 내응하여 가라를 배신하였다는 언급을 함께 생각한다면 가라국에 복속되어 있었던 탁순이 신라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항복하거나 가라와의 반목으로 신라에게 투항하게 되었겠지요. 탁순이 창원으로 비정된다면 구례산은 창원과 함안을 가르는 천주산-작대산-무릉산 산세를 가리킬 것입니다.(5) 그렇다면 백제가 신라의 공세를 막고자 계획한 6성의 입지는 자연스럽게 남강-낙동강-광노천으로 둘러싸인 지역이 되겠지요.
이제 신라는 낙동강-마산만으로 이어지는 경상남도 중앙선의 동편을 완전히 차지했습니다. 신라의 도도한 물결이 차오르는 것을 목전에 두게 된 가라는 이제 백제를 찾아가게 됩니다.
1. 하승철(2015), "소가야의 고고학적 연구", 경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 정효운(2009), "6세기 한ㆍ일관계사의 재구축 : 왜와 임나 관계의 재해석을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 56, 337-365.
3. 김현미(2005), "탁순국의 성립과 대외관계의 추이", 부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4. 김주용(2008), "창원ㆍ마산지역의 고분문화", '고문화' 71, 81-112.
5. 김성환ㆍ권혜영(2003), "함안ㆍ창원 지역의 지형경관", '전국 자연환경조사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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