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에도 관심을 - 가야연구 맛보기 (20) : 대가야와 백제의 충돌 보충 논의

 한참 전의 게시물 '대가야의 확장과 리즈시절', '대가야의 쇠퇴'에서 이미 어느 정도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만, 글을 쓴지도 오래되었기도 하고 가야권의 몰락을 이야기하려고 보니 추가로 몇몇 논문을 소개도 할 겸, 백제와 대가야의 충돌을 다시 re-mind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재탕을 좀 하도록 하겠습니다.


매번 이야기하지만 가야의 기록은 일본서기를 뒤질수 밖에 없는데 가야와 백제의 충돌을 암시할만한 이야기가 일본서기 현종 조(條)의 기생반숙녜(紀生磐宿禰)와 관련한 기사에서 나타납니다. 이 인물은 삼국사기/일본서기의 목협만치(목만치)와 동일시 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일본어로 나무가 き(ki)이기에 성이 서로 통하며 기록상 목협만치의 아버지 목라근자와 기생반숙녜의 아버지 기소궁숙녜 둘 다 신라를 정벌했고, 임나를 평정하였다고 하였으며 아버지의 공으로 자식인 목협만치와 기생반숙녜가 임나와 백제에서 전횡하다가 왜국으로 소환됨/임나를 거점으로 백제에 대항하다 왜국으로 건너감이라는 유사성이 있기 때문입니다.(1)

(현종 3년 - 487년) 이 해 기생반숙녜가 임나를 점거하고 고려(고구려)와 교통하였으며, 서쪽에서 장차 삼한의 왕노릇하려고 관부를 정비하고 스스로 신성(神聖)이라고 칭하였다. 임나의 좌로左魯·나기타갑배那奇他甲背 등이 계책을 써서 백제의 적막이해適莫爾解를 이림爾林에서 죽이고(이림은 고구려의 땅이다) 대산성帶山城을 쌓아 동쪽 길을 막고 지켰으며, 군량을 운반하는 나루를 끊어 군대를 굶주려 고생하도록 하였다. 백제의 왕이 크게 화가 나, 영군領軍 고이해古爾解·내두좌평 막고해莫古解등을 보내 무리를 거느리고 대산성에 나아가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기생반숙녜는 군대를 내보내 맞아 쳤는데 담력이 더욱 왕성하여 향하는 곳마다 모두 깨뜨리니 한 사람이 백 사람을 감당할 정도였다. (그러나) 얼마 후 군대의 힘이 다하니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알고 임나로부터 돌아왔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국이 좌로·나기타갑배 등 300여 인을 죽였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림과 대산성이 어딘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개로왕 패사 이후 고구려의 영역이 대전까지 내려오고 백제가 위축되었기 때문에 가야와 고구려가 서로를 인지하고 교감했을 수는 있겠습니다. 기생반숙녜가 가야의 어디와 내통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상황상 대가야와 연결이 되었을 법 합니다. 금강 상류인 장수군에 가야계 유적과 유물이 나오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가야권이 축조한 봉수 유적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대가야 혹은 대가야에 부용한 재지 세력이 기생반숙녜와 공모하여 금강을 따라 금산, 진안권으로 진출한 것으로 생각됩니다.(2,3) 개로왕 패사 이후 백제가 흔들리는 양상은 백제본기의 문주왕, 곤지의 암살, 좌평 해구의 반란, 삼근왕의 요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고고학적으로도 백제가 점유한 지역이 대가야 권역으로 넘어가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4) 이렇게 이탈한 지역을 다시 백제가 영역화 하려는 움직임은 무령왕 대에 가서야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계체 3년 - 509년) 봄 2월 백제에 사신을 보냈다. 임나의 일본 현읍에 있는 백제의 백성으로 도망하여 호적에서 빠진 지 3·4대 되는 사람들을 찾아내어 백제로 옮기고 호적에 넣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미 대가야와 충돌한 마당에 본격적으로 대가야 영역으로 진출하는 양상에 대해서 일본서기 기문-대사 할양 기록을 토대로 이미 다룬 바 있습니다. 기문과 대사에 대해서 여러 이설이 난립한 바 있으나 기문은 남원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섬진강 유역으로 합의가 되어가고 있고, 대사의 경우는 하동으로 보는 것이 통설입니다. 기문과 대사를 빼앗으려는 백제의 움직임에 대가야는 적극적으로 대항한 것으로 보이며 특히 대사의 경우 대사강에서 대치했다는 계체 9년 (515년) 기사나 계체 23년 (529년)에 다시 다사진을 요청하는 기사 내용을 볼 때 상당 기간 섬진강을 중심으로 일진 일퇴가 일어났을 것으로 보입니다.

순차적으로 금강 상류의 회복 - 섬진강 상류/진안고원의 획득 - 섬진강 수계 통제로 나아가는 백제의 전략이 최종적으로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결과물이 남해군에서 최근 확인된 바 있습니다. 남해 남치리 고분군에서 백제 은화관식과 대금구가 출토되었는데 기록상 6품 나솔 이상의 관리가 착용할 수 있는 물건으로 백제가 남해를 영역화 한 것을 보여줍니다.


1. 백승충 (2015), "『일본서기』 木氏 · 紀氏 기사의 기초적 검토 : 신공~현종기를 중심으로", '한국민족문화' 54, 57-101.
2. 곽장근 (2009), "금강 상류지역 교통로의 조직망과 재편과정", '한국상고사학보' 66. 45-74.
3. 신수진 (2016). "5세기 후반 가라국의 성장과 대산성 전투의 성격", '한국사연구', 113-144.
4. 이혁희 (2014), "진안 와정토성의 구조와 성격 재검토", '호서고고학' 31. 100-141.
5. 류창환, 김미영 (2014), "남해 남치리 1호분 발굴조사 성과", '백제문화' 51, 227-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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