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농업 이야기 완료기념) 춘화처리 이야기
포코로로(cswoojin)님의 연작 게시물 소련 농업 이야기( 1편, 2편, 3편, 4편, 5편, 6편, 7편, 에필로그1, 에필로그2) 완료를 기념해서 그 대척점에 있는 빌런, 트로핌 리센코의 업적에서부터 시작된 춘화처리 기작에 대해서 간단한 글(?)을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농부들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던 겨울밀과 여름밀의 차이를 본격적으로 과학의 영역(?)에서 다루어지게 만든 사람이 리센코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름밀은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데 겨울이 필요하지 않지만 겨울밀은 저온을 받아야만 꽃이 피게 됩니다. 원래 리센코는 온도조건이 식물의 생장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관심이 있었던 모양으로 저온 혹은 고온을 주어 식물의 생장 속도를 조절하려고 하였습니다. 겨울밀이 저온에 노출된 시간에따라 개화시기가 빨라지는 현상이 리센코, 그리고 스탈린과 소비에트의 마음을 사로잡은 모양입니다만 결국은 파멸을 불러왔다는 것은 포코로로님의 글을 참조하시면 되겠습니다.
최초의 흑역사를 뒤로하고 일정 기간의 저온이 여러 다년생, 혹은 이년생 식물의 개화를 유도하는 현상에 대해서 연구가 지속되어 왔지만 실제로 그 분자적인 기작이 밝혀지게 된 것은 채 20년이 되지 않습니다. 최초의 연구는 밀에서 시작되었지만 실질적인 유전 기작이 밝혀지게 된 것은 잡초에 불과한 애기장대라는 식물의 연구를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애기장대 역시 밀과 같이 겨울을 나야 꽃이 피는 겨울종 이년생과 겨울을 거치지 않아도 꽃이 피는 여름종 일년생 품종이 있습니다. 겨울종 애기장대와 여름종의 애기장대를 교배해 나온 자손의 표현형 분리비를 통해서 애기장대에 춘화처리와 관련된 유전자가 적어도 2개가 존재하고 있음을 90년대에 알게되었고, 생물학이 게놈 염기서열 분석법 덕분에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1999년과 2000년에 그 원인 유전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왼쪽 사진의 거대한 식물은 저온을 받지 못해 거대하게 자란 양배추이고 (이제는 아마 30이 되셨을)소녀가 들고 있는 식물은 저온 이후 개화한 동일한 양배추입니다. B는 애기장대 근연종인 사리풀의 여름종과 겨울종이고 C는 애기장대의 여름종과 겨울종의 모습입니다.>
그 두 유전자는 각각 FRIGIDA와 FLC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FLC라는 유전자는 개화를 억제하는 유전자이고 FRIGIDA라는 유전자가 있어야 FLC 단백질이 많이 만들어져서 꽃이 피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 FLC 단백질 생성이 매우 많은 유전자에 의해서 조절된다는 것이 알려졌고, FLC는 현재는 식물에서 유전자의 발현이 어떻게 되는지 연구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유전자 중 하나일 정도로 매우 유명한 유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저온이 어떻게 꽃을 피게 만드는 것일까 봤더니 저온 상태에서 FLC 유전자의 발현이 시간에 따라 점점 감소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개화 억제 유전자인 FLC의 양이 적어지게 되므로 개화와 관련된 유전자들이 점차로 증가하게 되어 이윽고 임계점을 돌파할 정도로 축적이 되면 비로소 꽃이 피게 되는 것이죠. 이 과정에는 VIN3라고 하는 또다른 유전자가 관여하고 있는데 FLC 유전자가 저온에서 점차 감소하는 것과 정반대로 저온에서 양이 점차 증가하는 유전자입니다.
<저온에서의 FLC 유전자 발현 패턴에 대한 간단한 모식도>
리센코의 생각과 달리 저온에서 일어난 FLC 유전자의 발현 감소는 다음 세대의 식물에게는 유전되지 않습니다. 이는 유전자의 발현 조절이 에피유전학적 방식으로 DNA 염기 서열에는 영향을 주지 않은채 그 발현 패턴만 바꾸었다가 생식세포가 만들어질 때 그 에피유전학 표지들이 모두 사라져 원상복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생물학의 기본을 몰랐던 것이죠.
많은 경우 애기장대에서 밝힌 분자적 기작은 다른 식물종에서도 동일하거나 유사하게 작동합니다. 이는 생물이 공통조상을 공유하므로 물려받은 유산이 유사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그러나 춘화처리 기작은 별개로 여러 식물 종에서 독립적으로 진화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밀의 경우 역시 저온이 특정 개화 억제 유전자의 양을 감소시킨다는 맥락은 동일합니다만 애기장대의 개화 억제 유전자와 밀의 개화 억제 유전자는 전혀 다른 종류의 유전자이기 때문입니다.
<밀의 춘화처리 기작과 관계된 유전자의 조절 모식도입니다. >
식물이 언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지는 매우 중요한 일로 적절한 시기를 맞추지 못하면 식물 입장에서는 자식농사를 완전히 망쳐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온화한 시기에 꽃을 틔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 겨울을 인지하는 기작이 독립적으로 진화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식물의 생존 방식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국가적인 수준에서 재앙을 불러일으켰지만 이후의 연구는 제대로 꽃과 열매를 맺어 교과서를 장식하는 결말을 이루어냈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두서없는 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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