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유럽어족의 고향과 그에 대한 고고학적 관점 (6)
The Indo-Europeanhomeland from linguistic and archaeological perspectives
DW Anthony and D Ringe
Annu. Rev. Linguist.,2015, 1(13) 1-21.
5. 확장 기작
어떤 사회적인 구조가 비-인구어족 사용자들을 인구어 사용자로 변하게 만들었을까? 고고학적인 증거는 기원전 4200-3300년 전에 적어도 3번에 걸친 흑해-카스피해 초원으로부터의 이주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각각의 이주는 서로 다른 환경 아래에서 발생하였고, 독특한 이주형태를 가지고 있다. 언어교체를 사회언어학적으로 세심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 이주들에 영향을 미친 상황을 연결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전(前)-아나톨리아인이 남동유럽으로 기원전 4200-4000년 전 이동한 양상은 Suvorovo-Cernavoda I기의 이주에 대응되며 이와 함께 원시유럽의 Tell(고대 거주지의 잔존물이 누적되어 생기는 언덕)문화가 갑작스럽게 끝난다. 두번째로 전-토하라인이 서부 알타이산맥으로 약 기원전 3300년 전에 이동한 것은 Yamnaya-Afanasievo 이주에 대응되며 서부알타이에서 유목문화가 시작된다. 후기 원시인구어 방언 사용 지역의 서부방향에서 일어난 일련의 문화권 확산 움직임은 기원전 3100-2800년경 도나우강과 카르파티아 평원으로의 Yamnaya-Hungary 이주와 기원전 3300년경 카르파티아 산맥 북쪽에서 남동 폴란드로의 Usatovo/Tripolye C2 확장에 대응되며 인구어 방언이 이 지역으로 전파되어 Corded Ware 문화층을 형성하게 만들었다.
<원시인구어가 확장되기 이전 원시유럽 문화권의 영역>
1차와 2차 이주 사이(기원전 4200-3300년)에 초원 경제는 혁명적인 전환을 맞이했다. 목축에 부분적으로 의존하던 초원 동석기 문화는 Khvalynsk 유적에서 보이는 것처럼 가축을 아마도 의식절차에서 이루어지는 공공적인 희생제례 용으로 사용했겠지만 이후에는 고인골 유골의 동위원소 비율 변화 자료에서 보여주듯 소와 양/염소 고기, 유제품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식생활로 바뀌었다. 목축 생산품에 완전히 의존적인 식생활로의 전환은 최초의 유목 생활방식 채택과 관련되어 있다. 마차의 사용과 목축에 필요한 승마술은 아마도 수레를 이용한 대량 수송과 말을 타고 빠르게 이동하던 생활에서 획득했을 것이다. Yamnaya 문화에서 기원전 3300년 즈음 시작된 이 변화는 초원을 개척하고 초식동물을 활용하는 방식에 혁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첫번째와 두번째 이주 사이의 초원 경제에는 상당히 다른점이 존재한다. 첫번째 시기는 다분히 정착생활을 영위했고 가축에 그리 의존적이지 않았다. 두번째 시기는 유목경제로 가축과 유제품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인구밀도가 더 높은 서쪽방향으로 이주해 사회구조적인 측면이나 언어 교체를 수반했을 첫번째와 세번째 이주는 수렵채집민이 있던 알타이산맥 지역으로 유목경제가 확산된 두번째 이주 양상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이 세가지 이주는 서로 상당히 다른 별개의 사건이지만 정치적인 제도 측면에서 다소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이 위의 세 초원 사회 모두의 정치적 경제 양상과 연관되어 있다. 사회적인 계층 양상이 무덤에 부장된 의복, 장신구, 무기의 빈부(貧富)를 통해서 드러난다. 제례나 혹은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일로 인한(예를 들어 생일이나 결혼) 축제의 희생 제물로 쓰인 소, 말, 양이나 염소의 양에서도 차이가 난다. 축제가 인구어 확장에 중요한 매개체였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언어학적 단서들이 있다. Dieler & Hayden(2001), Hayden(2001), Hayden & Villeneuve(2012) 논문에서 정치적인 계층의 등장은 공적인 축제 비용을 부담하고 개최할 수 있는 지배자가 징발하는 노동과 자원에서의 불평등이 수반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주장하였다. 이 축제는 대개 부와 힘의 과시나 기념, 보호를 기원하는 의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정치적 경쟁자들은 그들이 주최하는 축제가 얼마나 큰지,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한지를 통해 공공연하게 경쟁한다. 공식 축제에서 선물을 증정하거나 서약을 함으로써 동맹이 결정된다. 수장(首長)이 그들의 동맹자들에게 보호를 약속하는 선물로 선호되는 이국적인 물건의 필요성에 의해 원거리 교역이 활성화되었을 수 있다. 거의 모든 수장이 스스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방식의 일부로 축제를 이용하였으며, 이런 정치적 경제 형태는 야생 동물의 가축화가 일어난 직후의 동석기 초원지대에서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축제 전통에 사상과 문화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고, 축제 역시 정치적인 계층과 무관하게 발생했을 수 있다. 공식 축제를 영웅적인 개인이나 젊은 전사, 수장의 허영의 결과물이 아니라 북부와 서부 유럽의 신석기 문화(Linear Pottery Culture)와 연결하여 집안의 어른이나 집단의 연장자에 의해 사회적인 결속을 다지는 장(場)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초원 지역에서는 기원전 4500년경으로 보이는 Khvalynsk와 Dnieper-Azov의 묘지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소수의 풍성하게 장식된 단독묘가-남동 유럽에서 수입한 동제품과 조개와 곰의 어금니 장식과 돌칼, 화살촉, 잘 연마한 돌몽둥이-빈곤함이 드러나는 다수의 묘지와 극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가장 초기의 초원 고분인 도나우강 북쪽의 Suvorovo에서도 풍성하게 장식된 묘를 찾을 수 있다.
어떻게 동물 희생 의례와 초원의 사회적 계급 분화를 원시인구어 어휘에 맞춰볼 수 있을까? 원시인구어는 선물 교환과 관련된 어휘를 가지고 있는데, 축제에 해당하는 어휘는 신의 명예와 축복(영광glory [원시인구어: *kléwos], 승리victory [*séghos], 전리품booty [*sóru], 비, 넓은 목초지, 아들, 소, 부, 한마디로 풍요)을 구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된다. 축제의 주최자를 가리키는 원시인구어 어휘는 “손님들의 주인”을 의미하는 *ghosti-potis로 불멸의 신과 그의 필멸자 손님들의 음식과 술, 헌시(獻詩)로부터 영광을 받는 자(者)이다. 원시인구어는 주는 것과 관련된 어휘목록-‘주다give’, ‘하사하다bestow’, ‘하사품whatis bestowed’, ‘분배whatis distributed’, ‘나누다apportion’, ‘상reward/prize’, ‘정당하게받다totake/accept legally’-을 완비하고 있다. 찬양시는 너그러움과 후한 행동의 의미를 북돋워 주었다. Watkins는 원시인구어에서 특별한 종류의 노래를 가리키는 어휘를 발견하였는데[*h1erkw ‘선물의 찬송’] 이 어휘는 아나톨리아어, 토하라어, 베다어, 아르메니아어에서 동계 어휘를 찾을 수 있다. 찬양시는 신이나 지배자의 너그러움을 선언하고 그들의 선물과, 지배자의 명성을 고양하고(*kléwos), 불멸로 이르는 길(혹은 후대의 인구어 자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전쟁에서의 뚜렷한 공적이나 경건함을 이루기 위한 영광스러운 죽음)에 대한 내용을 나열하였다.
지배자의 너그러움은 불평등한 계급 체제가 사회에 허용될 수 있게 한다. 원시인구어 *h3ep- ‘부, 소유’는 확실하게 재구되는 어휘이며(히타이트어 happina(nt)- ‘부유한’, 라틴어 opes ‘부’), ‘부족하다to lack’, ‘비천해지다to be in need’, ‘하인servant’의 의미를 가지는 어휘가 있어 부의 불평등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축제에 동물을 제공하였을 Client, 문자적인 의미로 ‘추종자’[원시인구어: *sókwh2oyes]라는 단어 안에는 ‘희생하다’라는 뜻을 가진 형태소와 공물로 동물을 데려가는 행위를 나타내는 *bher-‘가져가다carry’라는 뜻을 가진 형태소가 투영되어 있다. 좋은 지배자가 공물을 자애롭게 받아준다는 의미 (*deḱ- ‘격식에 따라 받아들이다’)에서 파생된 어휘를 라틴어, 그리스어, 산스크리트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축제는 때때로 위신을 세우거나 부를 과시하기 위한 명예로운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원시인구어가 보여주는 정치/경제에 관한 언어학적 증거는 신석기의 고고학적 증거보다는 초원의 고고학 증거에 더 알맞다.
동시에 원시인구어 어휘는 수직적인 권력의 차이를 주인과 손님 사이의 수평적인 호혜 접대를 통해 부분적으로 해소되고 있는데(주인host와 손님guest 모두 *ghóstis를 어원으로 한다), 이는 주인이 손님에게 환대와 보호, 선물을 제공하는 것이 당연하고 손님은 언젠가 그 호의를 되돌려 주어야 하는 상호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호적인 관계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관계와는 다른 것이다. 손님과 주인 관계에 대한 관습을 해치는 것은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이며, 불경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손님-주인 관습은 비-친족과 이방인에 대한 상호 보호 관계로 확장되었다. 그것은 바퀴가 발명된 기원전 3500년 이후 유럽에서 더 빈번해진 이주 때문에 더 많이 마주치게 될 이방인들 사이에서 적대적인 행동의 가능성을 감소시키고 장거리 사회생활을 가능케 하기에 자주 이주가 필요한 사회에 매우 유용한 관습이었을 것이다. 이후 인구어의 확장기에 손님-주인 관습은 이방인 역시 명확한 권리와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대상자가 될 수 있게 하였다. 지배자-피지배자와 손님-주인 제도는 후대 인구어의 언어와 신화에 계승/발전되고 있어, 그것이 그들의 안전과 권력 유지에 중요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으며 아마도 이것이 새로운 추종자를 유인하거나 모집하는데 보탬이 되어 궁극적인 언어 교체를 이루게 되었을 것이다.
만약 지배자가 주최하는 공공 축제나 손님-주인 관습이 추종자를 불러모으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다면, 좀 더 폭력적인 원시인구어족의 제도가 이방인들이 인구어를 사용하는 지배자의 보호를 구하도록 강요하였다. 그 제도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젊은이들이 전쟁 집단에 참여하는 것이었다.(*kóryos) 비교신화학에서는 원시인구어족 소년이 나이가 차면 어엿한 성인으로 존경받는 신분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동년배 또래들과 함께 부랑배 집단에 입회하여, 파괴하고, 훔치는 난잡한 짓거리를 몇 년간이나 하고 다녔다고 말한다. 독일어 Männerbünde, 이탈리아어 sodales와 luperci, 켈트어 fianna, 그리스어 ephebes, 베다어 Vratyas와 Maruts는 젊음과 약탈/공동 방어, 무산자, 난잡함, 경계인이 유의어 관계이 있음을 보여준다. 젊은 무뢰배들이 인구어 사회에서 개척의 첨병이었음은 분명하다. 이들은 늑대나 개처럼 보이게 동물 가죽을 걸치고 이름에 ‘늑대’나 ‘개’라는 단어가 들어간 이름을 지었는데 이는 인구어 신화에서 죽음이나 전쟁을 상징한다. Bremer(1982)은 초기 로마의 전설에서 찾을 수 있는 어린 형제 주위를 배회하는 늑대들, 가진 것 없이 방랑하는 젊은이들의 이미지는 로마 건국에 이 젊은 부랑배들이 관련되어 있음을 의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 기원전 1900-1700년에 해당하는 한겨울에 개와 늑대를 제물로 바친 유적이 러시아 볼가 초원지 중심부의 Krasnosamarskoe의 Srubnaya(혹은 Timber-Grave)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는데, 적어도 51마리의 개와 7마리의 늑대가 희생물로 사용된 흔적이 있는 장소로 특별히 동짓날을 기념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는 인구어 신화에서 젊은 무뢰배 집단의 그것처럼, 개와 늑대가 은유적으로 겨울의 시작을 의미하고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전쟁 무뢰배들의 존재는 도둑질을 당하지 않거나 도둑질 당한 물건을 돌려받으려면 사회 안전망의 보호를 받아야만 하게 만들었다. ‘되돌려주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가 원시인구어 재구 목록 안에 두 개 있다. 하나는 *serk- ‘반환시키다, 보상하다’라는 단어로 히타이트어 sarnikzi ‘반환시키다’에 남아 있다. 또 다른 하나인 *kwey-는 ‘지불하다, 보상하다’라는 의미로 자손 어휘가 ‘목숨 값’, ‘복수’, ‘보답하다’, ‘벌금을 내다’, ‘죄’의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어 아마도 이 동사는 절도나 폭행에 대한 보상을 의미할 때 특별히 사용된 단어로 보인다. 청동기 시절 인구어족으로의 언어 교체 원인 중 일부는 인구어를 사용하는 지배자나 수장층이 거느린 전사 집단의 파괴행위로부터 보상을 받기 위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이 경우, 이를 다룰 ‘법정’의 언어도 인구어이고, 피해자의 요구대로 보상이 이루어졌는지 확인하는 조직 역시 인구어를 사용하는 기구였다.
수직적인 이동이 가능한 사회적 지위, 수평적 호혜제도, 시가 문학을 통한 불멸성, 연회의 너그러움과 같은 제도가 비-인구어 이방인들이 인구어를 사용하는 사회로 들어오게 만드는 틀이 되었을 것이다. 전사 집단으로부터의 폭력 위협이나 파괴를 보상 받을 수 있는 가능성 역시 일정 부분 인구어로의 언어 교체를 강요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기원전 3300년 이후에 새롭게 등장한 훨씬 생산적인 유목 경제와 금속과 다른 사치품(몇몇 지역에서는 소금)의 장거리 교역이 인구어 사용 사회에 위신과 권력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재구된 원시인구어 어휘와 고고학적 발견과 일치하는 이 언어 교체 기작들은 이방인들이 피지배자가 되는 것을 꺼려하지 않고 통합되게 하거나 이방인들 스스로가 영구적인 복속민이 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 모든 요소가 통합적으로 작용하여 침입보다는 가맹점 계약과 비슷한 방식으로 인구어족의 확산을 도왔다. 새로운 지역으로의 침투 과정에서는 적어도 이주나 군사적인 대치가 실질적으로 필요하였겠지만, 일단 조성된 지배자와 복속민의 관계는 원래의 초원 이주자들의 관습을 신화나 의례, 사회 체계가 재상산해 내는 관습을 통해 세대를 거쳐 언어의 형태로 먼 후대까지 이어지게 만들었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