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유럽어족의 고향과 그에 대한 고고학적 관점 (5)

 The Indo-Europeanhomeland from linguistic and archaeological perspectives

DW Anthony and D Ringe

Annu. Rev. Linguist.,2015, 1(13) 1-21.

 

 

4. 초원 고향 가설의 고고학적 함의(含意)


초원 가설과 아나톨리아 가설은 그 시기와 장소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와 형태를 해석하는 것에서도 차이가 난다. 농부의 언어가 확장되는 동력은 농업 경제 특유의 정주 생활로 인한 인구 증가 때문으로, 인구증가 압력에 따라 주변부로 퍼져나가면서 수렵 채집인의 언어를 대체해 나가게 된다. 아나톨리아 가설은 인구어의 성공적인 확장이 전지구적으로 관찰된 농경 확장과 연관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Mollory(1998)은 농경으로 인한 언어 천이가 아나톨리아 가설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한바 있는데, Renfrew의 Plan B에서 인도-이란어가 중앙아시아, 인도, 남아시아로 들어가게 된 것은 “상위계층 지배elite dominance” 현상이라는 농경 선주민 집단의 정복과 같은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농경을 통한 확장은 유럽지역의 인구어 만을 위한 설명 방식이다. 유럽의 인구어들의 기원이 신석기 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간단하고 명쾌한 해석으로 보이지만 앞서 다루었듯이 인구어가 신석기에 분리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너무 빠르고, 여전히 elite dominance와 같은 부차적인 설명이 아시아 방향으로의 인구어 확장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하다.


후대의 초원 가설은 유럽이나 아시아의 언어교체를 설명하기 위해서 훨씬 복잡한 사회언어학적 고려가 요구된다. 제국의 등장이나 정복과 같은 사건 없이 오랜 기간 유지되어온 비인구어족 농경 집단이 그들의 언어를 버리고 인구어족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청동기 시절 군사적인 정복은 언어 교체의 매개체라 보기 어렵다. 그 당시는 제국도 없고 정부도 없어 청동기 유럽의 무장된 지배집단과 경쟁해가면서 원거리의 부를 빼앗아 올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정치적인 맥락에서 생각한다면 고분이나 저장고에 무기류를 다량으로 부장하는 풍습을 보이는 인구어를 쓰던 소규모 부족이나 씨족 집단이 선주민 수장층과의 연합이나 동맹을 바꾸어 가며 일부는 이주하고 일부는 정착해 나갔을 것이다. 흑해와 카스피해에서 기원전 3300년 전 청동기 시대 이후, 그리고 중부와 서부 유럽에서 기원전 2800년 전 후기 신석기 시대 이후 계급과 관련된 무기류가 Yamnaya, Usatovo, Corded Ware, Bell Beaker 문화의 고분에서 흔하게 나타난다. 많은 지역에서 공식적으로 전사(戰士)계층이 등장하게 되면서 전쟁은 미화되고 전문적인 일이 되었다. 언어 교체와 상당한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정치적인 상호관계를 동반한 유럽의 지배계층 사이의 변화무쌍한 경쟁에 대해서는 고고학 이외에서도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재구된 원시인구어 어휘들(표를 참조)과 초기 인구어 시가 문학에서 나타나는 정치적인 상호관계와 관련된 정보에 대해서는 청동기 시대의 정치학 관련 논문을 참고하시라.


복잡한 사회 기층의 변화를 통해 인구어로의 변천을 유도한 과정에 대해 인구어족이 더 많은 인구를 가졌기 때문이라 생각할 이유가 없다. 남동부 유럽에서의 일말의 가능성을 제외한다면 구리와 청동기 시기 유럽의 어느 지역에서도 인구어족이 더 많은 인구로 비-인구어족을 교체해 나갔다는 증거가 없다. 기원전 4000년 전 동(銅)석기 원시 유럽 문화권은 유럽의 어느 지역보다 인구밀도가 높았고, 대부분의 인구어 확장에 대한 초원 가설은 인구어가 다수의 원시 유럽 문화권 사람들을 동화해 나간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초원의 유목민은 분명 원시 유럽 문화권 사람들보다 더 적은 수이므로 원시 유럽을 넘어 확장되는 것을 설명하는데 인구학적인 우세를 이야기하는 것은 부적합하다. 아마도 언어 교체는 위세, 경제적인 발전 가능성, 전략적인 측면에서 인구어 사용자들과 관련된 폭력으로부터의 보호 등을 이유로 필요한 수준에서 언어가 바뀌어 갔을 것이다. 이는 정복이나 직접적인 지배를 통해서가 아니라 위와 같은 상황에 놓였을 대 어떤 언어를 사용할 것인지 선택하는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사회적, 정치적인 인재 발탁과 관련된 새로운 제도적 장치가 이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룰 것이다.


언어 교체를 설명하기 위해 어떤 모델을 선택했든지 한 지역을 일괄적으로 교체해 나간 것이 아니라 패치 형태로 부분부분 교체가 일어났을 것이다. 로마 제국의 건국 시기 전후에 제작된 지중해와 남부 유럽의 금석문 탁본을 토대로 Ringe(2009)는 10~12개의 인구어족(대부분 그리스어, 이탈리어어, 켈트어 분파에 속한다.) 언어를 인정하였지만 당시 살아남아 있던 비-인구어 언어 역시 10개나 셀 수 있었다. 비-인구어에 속하는 몇몇의 언어는 지중해의 섬의 비석 명문에 기록되어 있지만(Linear A, Eteo-Greta어, Elymian, 렘노스어Lemnian), 대부분의 로마 이전 비-인구어 명문은 이탈리아나(에트루리아어와 동북이탈리아 Novilara의 비석에 기록된 언어) 알프스 산맥(Raetic), 이베리아 반도(이베리아어, 타르테시아어, 바스크어 – 로마 명문에 언어 이름만 기록되어 있다.)에 존재한다. 만약 그 시기(기원전 700-200년 전) 북부 유럽에 대한 기록물이 있었다면, 지중해에서 비-인구어족의 다양성이 기록된 것처럼 그 곳에서 사용되던 더 많은 비-인구어 사용자 지역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나톨리아 신석기 원시인구어 가설과 연관된 파문(波紋) 형태의 인구 확장 물결이 언어 교체를 일으키는 상황은 그런 언어 교체 양상을 설명하는데 적용될 수 없다. 인구어족은 후기 신석기/동석기/청동기 사회가 패치 형태로 역사적인 사건에 고무되어, 기회적인 방법으로, 많은 비-인구어족 섬을 남겨둔 채로 확장되어 나갔음이 분명하다.



<재구된 원시인구어 어휘 중 원시인구어 사용자들의 사회를 유추할 수 있는 어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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