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타이트와 그 영역: 히타이트의 역사적 영역에 관한 제(諸)문제 (1)
The Hittites and their geography: problems of Hittite historical geography
M. Alparslan and M. Doğan-Alparslan
European Journal of Archaeology 18(1), 2015, 90–110
초록
히타이트는 기원전 약 1650년 경 세워진 후 발전해 나갔다. 히타이트는 놀라운 조직력을 토대로 아타톨리아에서 그들에 적대적인 주변 상황을 극복하고 제국을 건설해 내었다. 기록에서 지명이 종종 등장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 확실히 비정된 곳은 그리 많지 않으며, 100년이 넘어가는 히타이트'학(學)'에서 최근에서야 이루어진 성과이다. 이 논문은 지명에 관련된 문제를 돌이켜 보고 그 문제의 복잡성을 보이면서 또한 히타이트사(史)를 개괄적으로 다룰 것이다.
머리말
민족을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지표인 언어 자료를 볼 때, 히타이트인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인도-유럽어족 사용자들은 인도양으로부터 북극해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에 걸쳐 존재하는 대부분의 언어를 포함하고 있는 거대 어족으로 이에 속하지 않는 언어는 터키어, 헝가리어, 핀란드어, 바스크어, 셈어족, 코카서스 어족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히타이트어는 인도-유럽어중에서 기록된 가장 오래된 구성원으로 아나톨리아어족이라는 이제는 멸종된 가지에 속한다. 근연어로는 기원전 2천년대의 Luwi어, Pala어, 기원전 1천년대의 Pamphylian어족-Lycia어, Lydia어, Side어 등이 있다. 히타이트어와 관련된 다른 사멸한 언어 중 아나톨리아어족과 별개의 언어로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히타이트인이 아나톨리아로 이주해 온 시기는 대략 기원전 3천년대 말에서 2천년대 초반으로 여기고 있다. 동시기 아나톨리아에는 아시리아 상인들이 세운 kārum이라고 불리는 시장과 역참이 있어 아나톨리아의 각 지역의 부족간 교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 상인들이 이름과 기술 용어를 기록한 쐐기문자 명판으로부터 우리는 이 인도-유럽어 사용자들이 소규모 부족 시절부터 아나톨리아에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히타이트인이 있기 전의 아나톨리아는 Hatti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 이름은 그들이 살던 지명에서 따 온 것이다. Hatti어와 Hurri어는 아나톨리아 남동부와 북시리아에서 사용되었는데, 현재의 코카서스 어족과 유사한 언어로 생각된다. Hurri인과 인도-유럽어 사용자들 사이에서 종교, 문화, 정치적인 분야에서 서로 자연스러운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Šuppiluliuma 2세의 이름이 적힌 상형문자 명문
최초로 아나톨리아를 통합한 정치체인 히타이트의 수도는 Hattuša였다. (현재의 중부 아나톨리아 Çorum-Sungurlu 지역의 Boğazkale) Hattušili 1세(1650–1620 BC)는 히타이트의 최초의 대왕으로 아나톨리아 밖으로 영토를 팽창시켰다. 그의 계승자들은 북시리아를 영유하려 했던 하투실리 1세의 정책을 계승하였다. 그 과정에서 히타이트인들은 북시리아 왕국에서 일하던 사서라는 직업군을 알게 되었고 그들을 본토로 데리고 왔다. 이와 함께 사서들이 그들의 언어를 기록하던 방식인 쐐기문자가 함께 히타이트로 도입되었다. 히타이트에서 쐐기문자를 점토판이나 왕의 인장에서 발견할 수 있지만 국가적인 기념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쐐기문자 이외에 히타이트는 에게어 문자에서 영향을 받은 별도의 상형문자를 사용했다. 이 상형문자는 모든 공식적인 기념비와 공식적인 인장, 왕의 인장의 중앙부에 쓰였고, 몇몇 무기나 토기의 장식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개인적인 물품이나 점토판에는 이 상형문자가 전혀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상형문자는 공식적인 용도로 사용되고 Luwi어나 보통의 히타이트어는 쐐기문자를 사용해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쐐기문자와 히타이트어(그들은 그들의 언어를 Kaneš/Neša어라고 불렀다.)는 공용어로 한정된 계층에서 사용되었을 것이다.
히타이트왕사 연표
히타이트사(史)를 간단히 이야기할 때 항상 언급되는 중요한 사건이 몇 가지 있다. 하투실리 1세의 계승자인 Muršili 1세(1620–1595 BC)의 바빌로니아 원정이 그 중의 하나로 정확하게는 정복이라기보다는 약탈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투사에서 바빌론까지는 1000km가 넘는 거리이기에 이 정복전쟁은 위대한 업적으로 칭송받았다. 바빌론의 정복과 파괴는 메소포타미아를 뒤흔들어 바빌로니아 아모리 왕조가 단절되고 카사이트 왕조가 세워지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바빌론은 하투사에서 너무 멀었기 때문에 무르실리 1세의 지지도는 낮았고, 하투사로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친척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Telipinu(1500–1425 BC)의 치세는 정치적으로는 약했지만 히타이트 역사에서는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 바로 텔리피누 칙령에서 최초로 왕위계승법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칙령에 따르면 왕비가 낳은 적자(대군)가 왕위계승자가 되며 적자가 없다면 후궁이 낳은 서자(군)가 왕이 된다. 아들이 아무도 없다면 공주와 약혼한 사위가 계승한다. 물론 이런 칙령이 계승분쟁을 막아주지는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지만,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왕위계승법이라는 것에 의의가 있는 것이다.
히타이트사의 또다른 이정표는 Šuppiluliuma 1세(1350–1320 BC) 시절에 일어났다. 왕은 아나톨리아 남동부와 북시리아를 정복하고 Mittani 왕국을 패배시켰다. 그 결과 풍요로운 시리아 북부가 히타이트 손에 떨어졌다. Muwatalli 2세(1290–1273 BC) 때에 히타이트와 이집트가 충돌하여 Kadeš 전투라고 이름붙은 유명한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집트 사료에서는 파라오의 승리를 주장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히타이트의 승리에 가까울 것이다. Hattušili 3세(1267–1240 BC) 때에 양 국가간에 맺어진 Kadeš 조약에서 분쟁지역은 히타이트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상 최초의 평화조약으로 그 복제본이 미국 UN 본부 앞에 세워져 있다.
Šuppiluliuma 2세(1207–1200 BC)는 마지막 히타이트의 왕이다. 히타이트의 몰락 원인은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원인이 거론되고 있는데, 기근과 가뭄을 포함하여 국가 내적인 분쟁이나 외부의 침공 등이 널리 언급되는 요인이다.
히타이트의 정치체제는 신정군주국으로 왕의 칙령은 신의 명령과 같은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졌으며 이에 대항하는 것은 모두 사형이었다. 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국민들은 자유민과 노예로 나뉘어져 있었다. 자유민이라는 단어는 특별한 계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법적으로 노예가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로 농부나 무두장이와 같은 기술자, 대장장이, 방직공과 같은 하층민을 포함하고 있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종교관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와는 필연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인간중심적인 사고관, 신들의 의무, 종교적 관심사, 제례의식, 예배가 사회와 영역 집단에 미치는 영향은 독특한 것이다. 인류 역사상 문화의 혼합은 각 사회 사이에서 수많은 종교적인 요소가 서로 오고가게 하여 연속적인 문화권을 창조한다. 누군가 히타이트인을 연구하게 되면 서로 다른 민족들로부터 도입된 다양한 문화적인 요소가 만들어낸 모자이크 문화를 맞닥뜨리게 된다. 이를 적절히 해석해 본다면 인도-유럽어족 히타이트인이 그들이 만난 문화에서 유래한 다양한 종교적인 요소를 그들의 문화 체계속으로 통합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히타이트인 사이에서 종교활동의 다양성은 그들이 만든 만신전(萬神殿)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만신전에 모셔진 신들을 원 문화권(인도-유럽어족 기원(히타이트인, Luwi인, 팔라인), 아시아 기원(Hatti인, Hurri인, Sumer인), 고대 이란 기원, 셈어족 기원(아시리아인, 바빌로니아인)대로 묶으면 히타이트인의 종교적 다양성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히타이트는 광대한 영역과 다양한 민족성을 가진 민족을 다스렸다. 다른 민족들의 신격을 모아놓는 일은 복속민들에 대한 우위를 보여주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Schwemer는 이 목적에 동의하지 않는데, 그는 이 정책을 하티아트의 신격 의인화 관념의 결과물로 보았다. 즉, 외국의 신을 데려와서 히타이트의 신에게 봉사시키기 위해 본토로 가져온 것이라 주장했다.) 이렇게 히타이트인의 종교에서 다양한 종교적 의례와 특징을 관찰할 수 있으므로 누군가는 이를 종교혼합주의라고 말한 바 있다.
국가 만신전은 하투사의 고위사제가 담당하여 일반 시민은 국가적인 종교 행사에 참여할 수 없었다. 축제를 기록한 문서가 이를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축제문서는 히타이트인의 종교적인 관습과 다양한 민족성에 기인한 많은 부분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히타이트인의 믿음에 따르면 신과 여신들은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며 각자의 집을 가지고 있었다. 수메르어 É.DINGIR(신의 집)은 사람들이 특정 신에게 예배를 드리는 신전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히타이트어에서 Ékarimmi-/Ékarimna-가 마찬가지로 신전을 가리키는 단어인데, 수메르어와 달리 예배를 드리는 장소가 아니라 신상(神像)이 거하는 개인 공간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이 신상들은 매일 정해진 규칙에 따라 손질되고 희생 제물을 받게 된다. 신에게 봉사하는 것을 실수하면 신이 화내어 나라를 곤경에 빠뜨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 농부, 기술자, 사제, 여사제, 요리사 등등 신에게 드리는 음식과 음료와 관련된 인물들의 부주의는 곧 국가를 위태롭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봉사, 청소, 경호와 관련된 신전 요원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지침서가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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