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에도 관심을 - 가야연구 맛보기 (17) : 포상팔국의 난 (1) - 기록의 문제
아시다시피 가야 각국은 스스로 제작한 기록물을 후대에 남기지 못했습니다. 기록물이 있었으나 유실되어 버린 것인지 원래부터 기록물을 만들지 못한 것인지는 지금으로써는 알 수 없습니다. 기원전 1세기경에 이미 가야지역에 기록과 관련 있을 붓과 삭도(지우개)가 전래되었고, 오랜 기간 중국 군현과 교류한 것을 볼 때 문자를 아는 식자층이 있었을 법 하긴 합니다만 그저 아쉬울 뿐이지요.
삼국유사에 가락국기의 내용을 전하고 있으나 김해의 수로왕에 대한 전승 이외에는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시피 하고 원전이 되는 가락국기의 편찬시기 역시 가야 멸망 이후 매우 늦은 시기에 정립되어 있어 그야말로 전승 이외의 의미는 없다고 보입니다. 그렇다면 믿을 구석은 단편적으로 널려 있는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가야에 대한 기록 밖에 없습니다.
가야 각국이 현재의 경남 서부에서 전남 동부에 이르는 지역을 점유하고 있었습니다만, 백제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백제본기는 아무런 이야기를 해 주지 않습니다. 이는 백제본기 자체의 기록이 부실하기 때문일 수도, 혹은 원래부터 가야에 대한 기록이나 전승이 빈약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백제본기의 서술에서는 영토 확장 기사에서 독립된 정치체의 국가를 정벌한 것이 아니라 지역, 촌락을 복속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맥락에서 국가명이 일괄적으로 누락되었을 수 있겠지요. 이와 달리 신라본기에서는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까지 지역 국가 명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라본기는 가야에 대한 몇 가지 전승을 기록하고 있는데, 탈해이사금과 김해와의 인연, 파사이사금 대의 실직곡국과 음즙벌국 전승 및 가야와의 분쟁, 그리고 내해이사금 대의 포상팔국 전쟁입니다.
14년 가을 7월에 포상(浦上)의 여덟 나라가 가라(加羅)를 침입하려고하자 가라 왕자가 와서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伊伐湌) 이음(利音)에게 명해 6부(部)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해주어, 여덟 나라의 장군을 공격해 죽이고포로로 잡혔던 6천 명을 빼앗아 돌려주었다.
또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물계자전에서 동일 사건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당시 포상(浦上)의 여덟 나라가 함께 아라국(阿羅國)을 치기로 하자 아라의 사신이 와서 구원을 청하였다. 이사금이 왕손 날음(捺音)으로 하여금 이웃의 군과 6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해주게 하니 드디어 여덟 나라의 군대를 패배시켰다. <삼국사기>
제10대 나해왕(奈解王) 즉위 17년 임진(壬辰)에 보라국(保羅國)·고자국(古自國)·사물국(史勿國) 등 8국이 힘을 합쳐 변경을 쳐들어왔다. 왕은 태자 날음(捺音)과 장군 일벌(一伐) 등에게 명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그들과 겨루도록 하니, 8국이 모두 항복하였다. 이때 물계자(勿稽子)의 군공이 제1이나, 태자의 미움을 받은 바, 그공에 대한 상을 받지 못하였다. 어떤 이가 물계자에게 이르길, “이전투의 공은 오직 당신뿐이다. 그런데 상이 당신에게 미치지 못하고, 태자가 미워하는 것이 자네는 원망스럽지 않은가?” 하니, 물계자가 말하길, “임금이 위에 계시는데, 어찌 신하를 원망하겠는가.” 하였다. 어떤 이는 말하길, “그렇다면 임금에게 아뢰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니, 물계자가 말하길, “공을 얻으려고 목숨을 다투고, 몸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을 가리는 것은 뜻있는 선비가 할 바가 아니니, 때를 기다릴 뿐이다.” <삼국유사>
신라가 가야를 구원해 주었다는 짤막한 기사에 덧붙여 물계자라고 하는 신라 장군의 개인적인 불행이 얽혀 있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워낙 가야의 기록이 없는 것에 더불어 신라 초기 기년의 불확실성이 서로 상호/상승 작용을 일으켜 각 전문가들 사이에 판이하게 다른 가설을 쏟아내게 만듭니다. 거기에 내해이사금 조와 물계자전에서 각각 가라와 아라로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상황은 이 상황을 부채질 하고 있지요.
일차적으로 이는 이 사건과 관련이 있는 우로의 계보도가 괴이하기 때문입니다. 기록상 우로는 내해이사금의 아들이거나 각간 수로의 아들인데 어찌됐든 조분이사금 2년에 이찬이 되어 감문국을 토벌했다고 하니 대무신왕 정도가 아니고서야 이 때에는 십대는 족히 지났어야 맞을 것입니다. 첨해이사금 3년에 사망하였으므로 우로의 아들인 흘해이사금은 첨해이사금 3/4년에는 태어났어야 하는데, 그 때 태어났다 하더라도 삼국사기 기년대로 한다면 즉위 시 이미 환갑에 가까운 나이인데 기록상으로는 어리지만 덕이 있다고 하니 괴이할 밖에요. 물론 계보상 몇 대가 빠져 있어서 그렇다고 할수는 있겠지요.
문제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기년과 고고학적인 연대가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해이사금은 196년에 즉위했다고 되어 있는데, 2세기말 경 경주인근의 대형 고분은 지금까지 사라리 130호 고분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고, 경주 독자적인 묘제인 세장방형목곽묘가 성립하는 것은 3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2세기 대에 경주와 김해 사이에 외교 관계의 성립이 일어나고 원군을 파견할 정도의 내적 성장이 일어났는가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게 만들며, 이 시기보다 늦은 때의 이야기를 연대를 끌어올려 작성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문제는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나 연대를 끌어올렸는가에 대해서 십인십색의 의견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소소한 문제점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변한 목록과 포상팔국에서 언급된 국가 사이에 겹치는 국가가 고자국/고자미동국 밖에 없고, 기록상 대국은 4~5천가이고 소국은 6~7백가라 하였는데 신라가 포상팔국을 물리치고 다시 되찾은 포로만 6천이라고 적어 놓아 당대의 실상과 괴리가 큰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라의 매우 큰 과장의 결과라 볼 수 있겠습니다만 마찬가지로 3세기중반 4~5천가 수준의 국가와 앞서 이야기한 상당한 수준의 정치체를 상상하게 하는 기록이 서로 연결될수 있는가의 문제를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물론 그보다 더 이른 시기의 파사이사금 대에 김해가 경주인근의 분쟁에 개입한 것을 생각한다면 거리와 인구는 별 문제가 아닐 수도 있지요.
참고자료
전덕재(2007), “경주 사라리고분군 축조 집단의 정치적 성격과그 변천”, ‘한국상고사학보’, 56, 143-166.
허남팔(2015), “포상팔국의 난 발생 시기와 성격 -4세기 중반 설을 제기하며-“, 가톨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