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티베트-버마어족의 분화와 기원에 대하여 (3)
The Diversity of the Tibeto-Burman Language Family and theLinguistic Ancestry of Chinese
George van Driem
BULLETIN OF CHINESE LINGUISTICS 1.2:211-270, 2007
Benedict와 내가 세운 시나리오 2와 관련된 가설에서 상의 갑골문의 본질은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Benedict의 가설대로라면 상나라 사람들은 전(前)중국어를 사용하지만 2b, 2c의 가설은 갑골문이 초기 중국어를 표현하는 문자였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Benedict의 관점을 지지하는 증거로는 5천개에 달하는 상나라 시기의 문자들 중 절반 정도만이 해독되었으며, 현존하는 구문들의 거의 전부가 매우 축약된 점치기용 파편에 남겨져 있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해독된 상나라 문자의 의미나 음운이 실제로 얼마나 정확한 연구의 결과인지, 상나라와 주나라 사이에 언어가 달라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상의 문자와 주의 문자를 비교해 그 음운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비 중국계 사람들로부터 초기 중국인이 그 문자를 빌려 왔는지에 대해서 진지한 연구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 사실, 이런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목적으로 상나라의 문자를 연구한다는 그 자체가 통설을 거스르는 일이다.
Benedict의 가설과 관계 없이 상 문자의 기원은 그 자체로 수수께끼이다. Keightley와 같은 토착주의자들은 갑골문자와 수메르, 이집트, 히타이트의 문자 체계 사이에는 공통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초기 상 문자가 다른 외부 집단의 영향을 받아 성립되었다는 가설에 반대한다. 기원전 2천년대에 등장한 쐐기문자와 이집트 히에로글리프, 갑골문 사이에 유사성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상의 문자체계가 외부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전의 이론은 쐐기문자나 히에로글리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황하 유역과 시기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가까운 인더스나 엘람인의 그림 문자의 체계에서 유사성을 찾았어야 했다.
이 두 그림 문자는 동 시기 청동기 기술이 전파된 것과 같은 고대의 길을 따라서 동쪽으로 퍼져 나갔을 수 있다. 인더스와 원 엘람 문자는 상의 문자와 형태적으로도 비슷하지만 이전에 내가 언급한 바 있듯이 각각의 문자소에서도 유사성을 나타낸다. 서주의 표의문자가 동시기 후기 박트리아 문자가 닮아 보이는 것과 그 이전의 초기 상 문자와 마찬가지로 더 이른 시기의 인더스, 원 엘람 문자가 비슷한 것은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 혹은 그러한 형태의 차이와 변천이 원래 같은 거푸집에 나온 견갑과 흉갑처럼 같은 기원을 가졌기 때문에 보이는 속성일까.
토착주의자들은 갑골문의 기원을 원래 토기에 장식하던 장식 형태에서 찾는다. 이를 추종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삼성퇴 토기의 파촉의 그림문자를 논의에 포함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몇몇은 상 시기의 문자 기록은 썩기 쉬운 것 위에 쓰여져 있어 현재 남아 있지 않을 것으로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만약 그런 추론이 타당하다면 인더스나 원 엘람 문자 역시 비슷한 연약한 물건 위에 쓰여져 있었고, 기원전 16세기 동쪽으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따라 황하 유역으로 전파되어 상나라 문자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도 타당할 것이다. 상아로 만든 귀중품이나 조개껍질 화폐, 그리고 다른 물건들이 원거리 교역을 증명한 것처럼 문자에 대한 지식이 삼성퇴를 거쳐서 이동했을까?
좀 더 근본적으로, 상 문자의 기원을 토기의 장식 문양에서 찾는 것은 semasiography-그림이나 기호를 통한 언어활동-를 떠올리게 하는데 이는 구석기 상층에서 이미 발달된 형태로 등장한 바 있다. Franco-Cantabrian 그림은 6만년에서 5만년 사이에 등장했는데-그중에서 특별한 견본품들은 브뤼셀 자연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는 기원전 4천년대와 3천년대의 동아시아 토기 장식 형태보다 훨씬 더 기호 문자체계에 가까운 것이다. Glottography-구어를 문자 형태로 나타는 것-는 기원전 3200년 수메르에서 나타났는데, Guenter Dreyer 연구팀이 Abydos에서 최근 발견한바에 따르면 Glottography의 시작 시기는 서 이집트에서 기원전 34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서아시아와 동 지중해의 다양한 문자 체계는 기원전 1600년 대에 등장한 상의 갑골문보다 1900년이나 더 거슬러 올라간 때에 이미 발달한 것이다.
상나라가 초기 중국어 계열 언어를 사용했다고 가정하더라도, 이 때는 이미 양자강이나 황하 유역에서 농경이 시작된지 천년 이상이나 지난 후이기 때문에 중국어의 언어적 조상은 상대적으로 더 늦은 시기에 등장한 신참자일 것이다. 이 개념이 시나리오 2의 중요한 특징이다. 최근에 이루어진 MHC(major histocompatibility complex)와 관련되어 있다고 알려진 HLA(human leukocyte antigen)의 다양성 연구는 역사적인 시기에 북중국의 알타이어계 사용자가 중국어계 사용자 집단으로 바뀌었다는 언어학적 관점을 지지해 주었다. 이는 시나리오 2의 Benedict의 설명에 대응하는 것으로, 아마도 원시 티베트-버마어 사용자 혹은 아예 어계가 다른 알타이어 사용자들이었던 상나라 사람들이 원 중국어를 사용하던 주나라에 의해 언어 천이(遷移)가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중국어의 기원에 대한 Benedict의 가설은 동아시아의 선사시대에는 어떠한 언어 환경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 폭넓은 추측을 가능케 한다. 만다린이 원래는 만주어와 중국어 사이에 발생한 피진어에서 기원했을 것으로 생각한 Hasimoto의 알타이화 가설을 고려한다면 긴 시간에 동안 간헐적으로 이러한 언어의 뒤섞임을 통해 중국어가 탄생하고 발전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뒤섞임의 제일 처음이 바로 Benedict가 추측한 그것일 것이다.
Benedict의 가설을 변형시킨 시나리오 2b에서는 티베트-버마어가 북중국에 등장한 시기를 이르면 용산 문화 단계에서부터 이후 문화인 이리두(二里頭, Erlitou)문화, 혹은 상나라 때로 잡는다. 산동성의 대문구(大汶口, Dawankou)문화와 앙소(仰韶, Yangshao)문화는 기원전 3천년대 중반 더 선진적인 후기 신석기 문화인 용산(龍山,Longshan)문화로 대체되었다. 용산 문화 시기(기원전 2600-1900년) 동안 인구는 증가했으며, 옥과 도자기와 같은 위세품이 산동성과 산서성 남부에서 증가하였다. 많은 용산 문화 취락지는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자원에 대한 보호의 필요성이 증대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이미 공성(攻城)흔적이 나타나는 후기 앙소문화 취락지가 Zhengzhou 근처 Xishan에서 발견된 적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약 기원전 1900 년경에 등장한 이리두 문화-표면적으로는 전설적인 하나라라고 결정된-의 중심 취락에서는 용도에 맞는 도구의 개발과 자원 관리 방식의 변화가 눈에 띈다. 이리두 시기의 묘제와 도시 구조 층에서는 복잡한 정치적 발달을 알려주는 구조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이러한 이리두 문화의 사회 계층은 남서부에서 침입한 티베트-버마어 사용자들에 의해 만들어졌을지 모른다. 반면, 이 침입에 대항하기 위한 용산문화 재지민들의 방어시설은 결국 허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입맛에 맞는 시나리오가 무엇이든 중국인과 티베트인의 확장이 고대와 그 이후 시기에 걸쳐 일어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확장의 길에 존재했던 많은 티베트-버마어족 일파와 그 일파에도 속하지 않았던 어족 집단을 없애거나 동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어와 그 문화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Tujia어, Bai어, 다양한 Lolo-Burma어, Qiang어, Hmong-Mien어, Tai-Kadai어 집단은 아직도 중부, 남부 중국에 흩어진 채로 남아 있다. 티베트인의 확장 역시 Zhangzhung 문학을 완전히 동화시키지는 못했고, 다른 언어로 된 둔황 문서 역시 지금까지 보존되었다. 이렇게 산재되어 있는 유산들이 과거에 일어난 일을 조용히 말해주고 있다.
티베트-버마어의 큰 두 줄기인 Bodo어와 중국어의 확장은 그것이 발생했다고 생각되는 곳에서 상당히 빠른 속도로 퍼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군사적인 활약과 같은 것에 더불어 Bodo어는 티벳 고원의 초원지대로 퍼져 나갔고, 동쪽으로의 전파는 그보다 훨씬 더 쉬웠을 것이다. 오로지 복건성의 산악지대만이 한나라 대에 이르러서야 중국어의 권역에 포함되게 되었다. 시나리오 2의 다양한 유형들이 공유하는 중요한 특징은 티베트-버마어가 확장되는 시공간에 대한 것이다. 사천성이 실제로는 그저 출발지에 불과하고 실제 중국 문화가 확립된 것은 섬서성이라거나, 초기 중국 문화 발생기부터 이미 산동성까지 침투해 들어갔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티베트-버마어족의 다양한 집단을 포괄하는 고향은 동 히말라야에 가까운 어딘가로 예측된다는 것이다.
시나리오 2c에서 추측하는 바는 티베트-버마어가 황하 유역에 전래된 것이 선사시대에 여러 차례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동쪽 절반에 해당하는 중국의 중심지역은 진나라가 기원전 221년에 통일하기 이전까지 통합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주 왕실로부터 분봉 받은 군주들이 기원전 천년 동안 황하와 양자강 유역에서 별도의 정치체를 세워 다스렸다. 상나라와 주나라, 진나라가 서로 다른 형태의 티베트-버마어 계통 언어를 사용했다는 가정은 상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 언어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결과로 등장한 크레올어가 결과적으로 한나라대에 중심 언어로 등장했을 것이다. Aronoff와 Meier, Sandler는 이런 식으로 생성된 중국어의 크레올 어휘의 여러 구조적인 특징에 대해서 목록을 작성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히말라야 지역으로 이동한 초기 티베트-버마어 사용자가 나중에 다시 황하강 유역으로 되돌아 갔을 가능성도 있다.
시나리오 3으로 명명한 가설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살펴보자. Bellwood는 티베트-버마어 대신 중국-티베트어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 이 어족의 고향을 북동쪽 끝을 황하 하류에, 남서쪽끝을 섬서성에 두는 긴 지역에 비정하였다. 이 기다란 지역에서 감숙성으로, 이어서 히말라야 남서부로 퍼져나갔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이러한 신석기시대의 농경 확장 가설은 상당히 흥미로운 모델이다. 이에 대한 고고학적인 해석은 Robert von Heine-Geldern과 같은 학자들이 이미 탐구한 바 있다. 그러나 Bellwood나 Renfrew에 의해 제안된 농경 언어 확장 이론은 감숙성의 마가요(馬家窯. Majiayao)문화와 유사한 문화가 티베트 고원을 건너 히말라야의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갔을 때 원 중국어-Bodo어 역시 전파되었다는 정도를 주장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신석기 농경 문화가 펴져나가는 정도와 함께 언어와 유전자 역시 전파되었을 것을 가정하고 있다.
이 모델은 유전자와 언어, 고고학적인 유물 변천이 동시에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게 만드는데, 실제 역사적인 변화 양상은 생각보다 꽤나 복잡하기 때문에 이 모델의 설득력을 오히려 떨어뜨리는 측면이 있다. 이 복잡성은 이 세 분과가 만들어내는 선사시대의 재구 형태가 상당히 불일치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각각의 언어학, 집단 유전학, 고고학분과 내부에서도 여러 층의 복잡한 양상이 드러나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오세트인은 동 이란어계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로 서 이란어계 사용 집단보다 더 서쪽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알란인이나 사르마트인이 북중부 코카서스로 이동한 흔적으로 생각된다. 유전자 비율의 지리적인 분포 양상은 여러 번에 걸친 이동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역방향의 인구 이동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한 지역의 시간에 따른 인구 이동 양상에 대해서는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고고학은 특정 문화 양상을 정의하고 어떤 인구 집단이 이동했는지에 대해서 밝혀내어야 한다.
농경 언어 확장 모델은 오스트로네시아어와 같은 사례에서나 제한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 언어 집단은 대만에서 혹은 하모도(河姆渡. Hemudu) 문화가 대만으로 이동하면서 시작한 집단으로 이전에 사람이 존재하지 않은 섬에 정착해 나가면서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 이론이 이미 선주민이 존재하는 환경에서도 강력한 언어 전파의 동력원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 고고학적으로 그 사용자 집단의 언어를 추론한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발상으로 기술적으로 선진적인 신석기 문명이 낙후된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사람과 언어 역시 확장되어 나간다는 가설은 그럴 듯해 보인다.
그러나 농경 언어 확장 이론은 전반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신석기 농경을 통한 부의 축적이나 그로 인한 계층 분화 및 명령 체계가 등장했을 것이고 이것이 여러 지역으로의 인구학적인 확장을 야기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매우 그럴듯하지만 이는 농경 확장 이론에서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이 모델의 중심 교리는 신석기 생활 양식의 확장이 어족의 확장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론은 고대의 언어 확장이 신석기 농경 문화에 의한 인구학적인 확장 방향과 일치할 것이라는 논리를 수반한다. 앞서 시나리오 2에서 언급했듯이 이와 반대되는 여러 사례들을 꼽은 바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알려진 고고학적 기록에 기초한 물질 문화의 확장 양상보다 언어 양상의 변화가 더 급격했을지도 모른다는 관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시나리오 3을 지지할 수 있는 근거에는 무엇이 있을까? 중국-티베트어 가설은 티베트-버마어 집단 내에서 모든 비 중국어 계열 언어를 통합할 수 있었던 문화적인 혁신성이 무엇이었는지 실증적으로 증명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 모델이 가지고 있는 참신성, 특히 중국 중심적인 관점은 여전히 유효하며, 앞으로 이를 결정적으로 반박하는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여전히 다루어질 가설이다. 물론 아직 반박되지 않았다는 것만이 시나리오 3을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다.
시나리오 3이 가지는 잠재적인 장점은 중국-오스트로네시아어족 가설에 영감을 준다는 것이다. 물론 이 가설은 아직 엄격히 증명된 바는 없다. 중국-오스트로네시아 어족 이론을 지지하는 증거들에 대해서 일전에 다룬 바가 있다. 티베트-버마어족과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을 아우르는 유전적인 유사성과 같은 증거가 드러나 중국-오스트로네시아 어족의 존재가 증명된다면, Sargart가 믿는 것처럼 용산 문화 시기에 이미 북중국 평원에 원 티베트-버마어가 사용되었을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Sagart가 추측한 것처럼 그 유사성이 초기 중국어와 오스트로네시아어의 접촉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라면 원 티베트-버마어 사용자 집단은 용산 문화 시기 산동성의 동쪽 지방에 살았던 것이 된다.
반면에, 이 언어 사이의 어휘 대응이 우연히 닮은 꼴 모음이 아니라고 볼 이유도 없다. 어휘 대응이라고 널리 인정되는 몇 안되는 어휘 사례를 Hendrik Kern이 밝혀낸 바 있는데 오스트로네시아어의 *beRas (현미)라는 어휘가 티베트어의 hbras (쌀)에 대응된다고 한 것이다. Sagart는 이것에 상고한어의 糲 *mə-rat-s 역시 동일어원 목록에 추가하였으며, 오스트로네시아어 *Sumay (쌀밥)이 상고한어 米 *mˁijʔ (볍씨)와 Garo어 may (논밭)에 해당하는 어휘임을 지적하였다. Kern은 이 차용어가 티베트인이쌀 농사를 시작하면서 얻게 된 어휘라고 여겼다.
만약 중국-티베트 어족이나 중국-오스트로네시아 어족 가설이 엄밀하게 증명된다면 시나리오 3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로는 언어적인 근거만으로는 어떤 가설이든 배제할 수 없는 상태이다. 시나리오 3을 지지하는 언어적인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것이 Bellwood의 모델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Bellwood의 가설에서 생각한 것과 유사한 결과를 유발할 수 있는 또 다른 상상을 할 수 있는데, 현재의 티베트-버마인을 전쟁을 일으켜 약탈과 파괴를 일삼는 집단을 피해 히말라야로 도망친 난민의 후예로 설정해 보자. 즉, 현재의 티베트-버마어의 분포 양상은 난민들이 그 땅을 통과하면서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삼성퇴나 안양에서 나타난 것처럼 주변 민족을 잡아 희생 제의를 올린 문화 집단이 나머지 티베트-버마인들을 그들이 쫓을 수 없는 산악 지형으로 도망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Bellwood의 시나리오 3에서 말한 티베트-버마어의 고향은 섬서성 전체에 걸쳐 있기 때문에 시나리오 1에서 가정한 원 거주지인 사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그러므로 시나리오 1과 3 사이의 거리는 시나리오 2와 3 사이의 차이보다는 별로 심하지 않다. 시나리오 2의 장점은 어족 집단의 언어적인 다양성 차이에 기초해서 선사시대의 언어적 환경을 재구성했다는 것으로, 고고학적인 기록은 이 재구성에 대한 고대의 물질 문화적인 증거로써 사용되었다. 새롭게 발달하고 있는 유전학 데이터는 시나리오2를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앞으로의 유전학 증거에 따라 그 신뢰성이 판가름 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문제의 하플로그룹들이 수형도(樹型圖) 형태로 나타날 것인지 아닌지의 여부 같은 것 말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잠정적인 결과는 더 많은 데이터가 분석되고 해석된다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기에 이 다면적인 이야기는 지금으로서는 예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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