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역사 사이 (하나라와 상나라를 중심으로)
엊그제 대선배님(?)의 고고학 관련 떡밥 때문에 발견하게 된 논문인데 한 단락이 마음에 들어 번역해 봅니다.
Li Liu and Hong Xu (2007) - Rethinking Erlitou: legend, history and Chinese archaeology, Antiquity 81, pp 886-901.
신화, 전설, 역사, 그리고 고고학
상나라 임금의 이름이 적힌 가장 초기의 기록은 하남성 안양시에 있었던 상나라의 마지막 수도인 은허(약 기원전 1300-1046년)에서 발굴된 갑골 명문(銘文)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명문은 하나라나 상나라의 연대에 대해서 아무 이야기도 해 주지 않았다. 하나라와 상나라의 연대기는 그 이후에 여러 고대 문서에서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바로 고본 죽서기년으로 기원전 3세기 경에 문서화 되었으며 서기 280년에 발견되었고, 사마천이 일찌기 기원전 1세기에 그 존재를 기록한 바 있다. 이것은 진서이지만, 이미 상나라가 멸망한 지 700 년 후에나 기록된 물건이다. 1920년대 은허에서 발굴된 갑골 명문 연구로, Wang Guowei는 그 명문에 기록된 임금을 서기에 적힌 상나라 연대기의 임금 목록에 대응시킬 수 있었다. 그는 서기에 기록된 상나라 연대기가 신뢰할 만 하므로, 마찬가지로 동일한 문헌에 기록된 하나라의 연대기 역시 믿을 만 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이 견해는 중국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에게 주류설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고고학자들은 하나라 사람들과 하 왕조가 남긴 문화를 찾을 필요가 있다고 믿게 되있고, 이 고고학적인 결과물을 역사 기록과 엮어 과거사를 재구성하는 것이 그들에게 최종적인 목표물이 되었다.
하나라와 상나라의 연대기를 고고학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이 일반적인 접근 방식에는 커다란 논리적 공백이 존재한다. 바로 역사적인 연대기와 구전 전승의 연대를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인 연대는 실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정확하게 기록하려 하지만 구전 전승은 정확한 시간 축을 결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구전 전승은 중요하다고 여기는 과거의 일화를 이야기하고 전하기 위한 것이지 정확한 시간 정보는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정보는 고대 문헌에서 대개 하나의 체계로 통합된 상태로 존재한다. 고대인들인 이 개념이 서로 다른 개념이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에게는 신화와 역사를 별개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하나라와 상나라의 역사로부터 신화를 분리해 내려면 우리는 두 가지 질문에 답을 해야만 한다. 첫째, 하왕조는 존재했던 것일까? 하나라의 역사성에 대해 서로 다른 두 관점이 존재한다. 많은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이 하왕조의 실존을 믿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많은 수의 학자들은 하나라와 관련된 문헌 정보의 진실성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하며 이를 주나라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전설의 왕조로 본다.
예를 들어 Keightley는 하나라의 우나 걸과 같은 임금은 서주(西周)의 창작물로, Allan은 상나라에 적대적이었던 선주민이 하 신화의 원형이었다는 가설을 제시하였다. Allan에 의하면 이는 서주 초기에 창조된 관념으로 주나라의 상나라 정복이 천명에 의한 것이라는 정당화를 위해 이 신화가 상에게 정복당한 역사적 왕조 이야기로 변형되었다는 것이다. 하에 대한 동시대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하나라 사람들에 대해서 기원전 2천년대 후반, 상나라나 혹은 또다른 동시대 사람들에게 구전되어 오고 있었을 일말의 가능성은 있을 수 있지만, 지금까지 하왕조의 존재를 입증하는 증거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나라 이전에 하나라라는 독립된 정치체가 존재했을 수는 있다. 물론 그 존재가 왕조였는지, 국가였는지, 군장 정도였는지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지만 말이다.
두 번째 질문은 연대기의 재구성과 관련된 문제인데, 하나라와 상나라의 건국 시기는 언제일까라는 것이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갑골명문에서 중국 최초의 왕계에 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긴 하지만, 각 왕의 재위기간과 같은 시간 정보는 명문에서 확인할 수 없다. 이 명문들은 예식 절차를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왕들의 재위 기간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은허 말기 기간에 들어서서야 집전한 희생제의의 횟수를 통해 재위 기간에 대한 일관성 있는 기록이 나타나지만 이 시기의 상나라 사람들 스스로도 초기 왕들의 재위 기간에 대해서 확실히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상나라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나 이후 왕조들에게 전승된 상나라의 연대기는 정확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그보다 더 전인 하에 대한 추정 연대는 더더욱 의심스럽다.
고본 죽서기년이 통치 기간을 명시해서 긴 연대를 추정하게 해 주는 초기 문서이긴 하지만 Keightley는 이 작업이 주나라의 작품이며 그 연대를 신뢰할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기년에서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기까지 자세한 재위 기간이 제시되고 있는데 역사적이라고 여기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하나라 임금들의 재위 기간은 비정상적으로 길게 기록되어 있는데, 우(禹)는 45년, 화망(和芒)은 58년, 불강(不降)은 69년 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한다. 이는 동주 시기 저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메타-역사적인 관습이 반영된 것일 것이다.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수록, 상상의 산물을 더 자유롭게 만들 수 있었다.'(Keightley 1978: 433)
고 문헌에 나타난 하와 상의 연대기가 실제 역사를 반영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며 초기 왕계 역시 역산해서 창작, 조합, 변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하와 상에 대한 왕계는 구전 전승의 연대기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고대 중국만이 이런 먼 과거의 왕계까지 이야기하는 문명은 아니다. 수메르, 이집트, 마야 등 많은 다른 문명권도 구전 전승에서 기원한 그들의 유구한 역사적 전통을 기록하고 있다. 다양한 고대 왕국의 왕족 계보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한 Henige(1974)의 말을 따르자면 왕대(王代), 족보, 과거 구전 전승 기간 동안에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할 때 광범위한 연대 왜곡이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계보는 별개의 인물의 기록이 겹쳐져서 짧아질 수도 있다. 건국 시기의 몇 세대와 기록 시기보다 4에서 6대조 위의 세대의 기억을 기록할 때 이런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계보는 인위적으로 길게 늘어지기 마련으로, 왕의 목록에서 이러한 과장된 과거 역사 기록을 마주할 수 있다. 통치자에 의한 이런 계보 조작은 각지에서 대동소이한 이유로 이루어진다. '계보는 그 사회가 존재했던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넘어서는 인식을 투영하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많은 상황에서 일련의 조치로 풀기 어려운 사회,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계보가 만능 도구처럼 사용된다.'
기록된 재위 기간에 왜곡이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여러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수메르의 왕 목록을 예로 들자면 그것은 기원전 2100 년 무렵에 메소포타미아를 다스렸던 왕조의 목록을 보여준다. 115명의 지배자가 순차적으로 나열되어 있지만 실제로 이 왕 목록의 대부분은 순차적으로 승계한 것이 아니라 동시기에 서로 다른 도시를 다스린 지배자를 기록한 것이다. 연대 왜곡을 통해 역사적으로는 600 년에 걸친 수메르 왕의 목록은 1900 년이상의 기록이 되었다. 초기 마야 기념비의 상형문자는 기원전 1 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역법의 탄생 시기를 기원전 3114년으로 설정하고 있는데, 이 시기는 이 지역에서 최초의 농경 사회가 등장하기 천 년도 더 이전인 시기이다. 마야 기념비 건립의 일차적인 목적은 통치자와 그들의 계보를 우상화 하기 위한 것으로, 지배층의 이런 긴 역사는 선조들에 대한 숭배와 혈통의 연속성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 정치, 종교적인 문맥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잉카와 아즈텍의 왕 역시 그들의 역사와 전승을 다시 썼는데, 태양신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성스러운 계보를 통해 그들의 정치, 경제, 군사적인 확장을 정당화 하고 있다. 물론 모든 역사적인 진술이 정치적인 프로파간다에 의해 완전히 창조되지는 않았겠지만 통치자는 왕대나 족보를 위조하고자 하는 명백한 정치적 동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과거의 기록은 항상 이러한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고대 중국은 이런 왕계 조작의 유혹과 관련이 없을 것이라는 믿음은 아무 근거가 없다. 실제로 Henige는 하와 상의 연대기에서 여러 종류의 왜곡을 발견해내었다. 전설과 실제, 구전 전승과 역사적 사실 사이의 뒤섞임이 발생했을 것이다. 갑골 명문과 이후 문헌에서 언급된 고대 왕들의 이름이 여러 세대를 거쳐 구전 전승된 실제 이름일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왕의 목록이 왕조의 역사에 따라 완벽하고 정확한 순서대로 기록되었다고 장담할 수 없으며, 수백년 이후에 기록된 하와 상왕조의 통치 연대를 실제 역사와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이는 하와 초기 상 왕조의 계보는 당대의 통치자가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에 맞게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연구에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 연대가 왜 혹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연구하는 것이지 그 연대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고고학 결과에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다.
한줄 요약 - 실제 사실을 후대에 알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대 관념과 정치적 필요성 때문에 기록된 고대 역사를 왜 자기 마음대로 실제 사실이라고 판단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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