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 시대 인도-유럽어 확산에 대한 최신 분자유전학 연구 (하-1)

 원 논문은 정말 분자유전학 논문이지만 supporting information에서 다룬 고고학적인 내용만 번역해서 올립니다. 분자유전학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실까봐 부연설명 합니다.

 

 

ME Allentoft et al. (2015) - Population genomics of bronze age Eurasia, Nature.


1.1 청동기 - 개시

 

기원전 약 3천년 경 메소포타미아에서 도시와 국가의 등장으로부터 청동기가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만 몇몇 고대 도시들은 이미 기원전 4천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앞선 구리 합급은(청동을 포함한) 농기구, 무기, 장신구, 조리용 혹은 음식용 식기세트에 이르기까지 경제적으로 광범위하게 이용되었다. 이처럼 구리에 대한 수요는 매우 높았지만 메소포타미아 주변에서는 이 금속을 전혀 구할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수요를 코카서스, 이후로는 오만에서 채취한 것을 교역을 통해 충당했다. 아나톨리아와 코카서스의 구리 광산에 대한 탐사는 기원전 4천년대 초, 중반에 이미 시작되어서, Uruk 이동이라고 알려진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이동한 이민자 집단이 이미 북쪽 지역에 정착해서 새로운 교역 루트를 만들어, 메소포타미아 중심부로 흘러들어가는 구리, 금, 은의 흐름을 확보하고 있었다. 아래에서 언급하는 시기는 대강의 것으로 각각의 문화에 대한 정확한 시점은 앞으로 좀 더 논의되어야 한다.

 

 

1.2 Maikop and Late Tripolje (3700-3000 BC), Yamnaya (3000-2400 BC), and Remedello 1 (3400-2800 BC) cultures

 

이 이주민들의 사업 결과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위세품이 코카서스 지역으로 흘러들어왔다. 이에 기원전 4000년 대 중, 후반, 북 코카서스 지방에서 Maikop 문화에 해당하는 수장층 고분군에서 다량의 부장품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사적 소유와 일부일처제 가족에 기반해서 초원 지대에 등장한 최초의 계급 사회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위세품과 금속 상품을 정기적으로 교역한 덕분에 덩달아서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배워 온 개념일 것이다. 코카서스 북쪽 구릉지대에서 시작된 이 사회 양식 - 개인이나 가족 단위로 분묘에 안치하는 이 새로운 매장 양식은 곧 초원 전 지역으로 퍼져나갔으며 이 문화의 확장은 주로 양을 목축하는 새로운 형태의 경제 체제와 연관되어 있다. Maikop 문화에서 생산한 금으로 만든 양 세공품은 그들이 가축을 사용해 초기 형태의 수레를 끌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문화 양식은 빠르게 북유럽 전체로 퍼져 나갔다.

 

기원전 4천년 기간 동안, Tripolje 문화로 알려진 만 명 단위 이상의 사람이 살았을 400 헥타르 이상의 거대 정착지가 서부 삼림-초원지대와 초원 경계 지역에서 조성되었다. 기원전 4천년대 중반 이 거대 인구 집단은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고 붕괴되었고, 정착지는 버려졌다. Tripolje 사람들은 초원지역으로 확장하여 Maikop 집단과 접하게 되었고, 개인 부장 양식과 야금술을 배웠다. 말의 가축화와 수레의 발달은 이후에 마차로 이어져서 초원의 목축 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다. 문화의 융합으로 탄생한 이 새로운 유목 사회는 Yamnaya 문화라고 불리는데, 헝가리에서 우랄산맥에 이르기까지 동서로 빠르게 확장되었다. 이 Yamnaya 확장은 초기에 분화된 아나톨리아/히타이트어 이후, 원 인도-유럽어의 확장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북 이탈리아의 청동기 문화는 Remedello 문화로 포강 삼각주와 알프스 산맥의 이탈리아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시기는 유명한 "Iceman"과 동시기인데, 이 문화는 청동제 단검, 도끼, 창, 핀이 다수 부장되는 평평한 무덤을 만든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은 북부 알프스와 에게 해, 아나톨리아 문화와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최근 기존에 발굴된 러시아 샘플에 대해서 연대 측정이 다시 매겨지게 되었다. 민물 섭취에 의한 비축 효과 때문에 기존의 유골 측정 연대가 때때로 300~400년 이상이나 오래된 것처럼 나왔던 것이다. 이는 무덤에서 함께 나온 동물 뼈나, 동물 뼈로 만든 물건, 목재에 대한 광범위한 연대 조사를 통해 증명되었다. 그러므로 아래에서는 Yamnaya와 여러 연관 문화에 대해서 새로 산정된 하향된 절대 연대로 표기할 것이다.

 

 

1.3 Yamnaya (3000-2400 BC), Catacomb 2700-2300 BC), Afanasievo (2900 ? 2500 BC), and Okunevo Culture (2500-1900 BC)

 

Maikop 문화로부터 도입된 새로운 사회, 경제, 기술 양식은 초원 사람들에게 곧 채택되었고, 기원전 3000년에서 2400년 전에 걸쳐 존재한 Yamnaya 문화의 성립과 급격한 팽창을 만들어 내었다. Catacomb 문화는 깊은 catacomb 형태의 무덤을 만드는 지역 특이적인 변이 형태로 동유럽과 그리스에서도 종종 발견되고 있다. Yamnaya 혹은 수혈 분묘 문화는 분묘 아래에 개별적으로 수혈이나 갱도를 만드는 무덤 양식으로 대표되는 문화이다. 때때로 분묘 위에 돌로 만든 비석을 올려놓는 경우도 있다. 경제 형태는 계절에 따라 목초지를 순환하는 목축에 기반한다. Anthony가 Yamnaya 문화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Yamnaya 문화는 높은 수준의 이동성-초원 지역에서 거처를 옮겨다니는 문제부터 많은 가축을 다루기 위한 정치, 사회적인 인프라 발명을 동반하는-에 대해서 사회가 변화하는 것을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고고학적인 예시이다. 이 문화에 정착지가 없는 것에 대해서 "정착지가 전혀 없는 것에 대한 가장 적절한 해석은 동부 Yamnaya에선 대부분 그 삶을 마차 위에서 보냈다는 것이다." 가축 무리를 관리하기 위해 말타기가 도입되었다. 기원전 2900년 경 서부 Yamnaya 문화는 Carpathia 분지에서 헝가리 평원에 이르는 지역까지 확장되었다. 동쪽으로는 우랄산맥과 그 너머 지역까지 이르렀으며 그 이후 거의 천년간 그곳이 Yamnaya 문화의 동쪽 한계선이었다.

 

Yamnaya 문화의 확장이 Ural 인근에서 멈추었던 건 사실이지만, 몇몇 그룹은 더 먼 지역의 목초지까지 찾아 헤맨 것이 분명하다. 이는 서부 시베리아의 동부 초원지대에서 초기 Yamnaya와 문화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외부 문화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태적 분화 양상에 대한 고고학적인 설명은 원거리 이주민에 의한 결과로 보는 것이 통상적이다. 서부 초원지대에서 Repin 문화로 알려진 전(前) Yamnaya 문화 초기에 이주가 일어났을 것이다. 2000 km에 걸친 길을 따라 중부 초원지대에서 알타이 산맥으로 방목에 적합한 목초지를 찾아 이동했을 것이다. 이 이주 정착민은 서부 초원에서 기원한 발달된 고분 문화와 유목 경제를 소개했을 것이다. 이 이주 경로와 길을 따라 만들어진 중간 기착지는 후기 Yamnaya 집단까지 계속해서 사용되었다. 이 문화 유형은 알타이 근처의 Afanasievo 문화를 형성시켰다. 다시 말해서 Afanasevo 문화는 남서부의 파미르에서 알타이에 이르는 천산산맥 지역의 문화와 남서부의 아시아, 근동 지역에서 기원한 유목 문화를 이어주는 것이다. Afanasievo 문화에서 남쪽의 신강 자치구와 타림 분지로 이주한 서부 유럽에서 기원한 원 인도-유럽인 집단이 두번째로 분화가 오래된 토하라어를 이 지역에 도입했을 것이다. 다른 가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토하라어가 파미르와 힌두쿠시 지역 사람들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생겨났을 것이라 보고 있다. 이후 Afanasievo 문화의 영향을 받아 생성된 남 시비리 지역 문화인 Okunevo 문화는 주술적인 미술로 장식된 돌 비석이 특징적이다.

 

 

1.4 Corded Ware, Battle Axe, and Single Grave cultures (2800-2300 BC)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이들은 기원전 2800년에서 2300 년 사이 유럽 온대 지역에서 만들어진 일련의 유사 문화들이다. 이들은 Yamnaya에서 기원한 분묘 아래에 구멍을 만들어 개별로 시신을 안치하는 문화를 공유하고 있으며 (단 스웨덴 Battle Axe 문화는 예외다.), Yamnaya 문화에서 구리 도끼를 부장한 것 대신에 잘 만들어진 석기 도끼를 부장한다. Corded Ware 문화는 맥주를 잡기 위해 노끈을 매단 새로운 형태의 토기를 발달시켰다. 이것은 이 집단들이 공통적인 음주 예절/의례를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 형태는 주로 유목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중부 유럽에서는 농경 요소가 점차 강해졌다. 이러한 유랑 농경-목축 경제의 확장은 매우 빠르고 때때로는 급진적이기까지 했는데, 작센-안홀트 지역에서 최근에 발굴된 무덤은 13명의 작은 가족이 학살당한 흔적을 보여주었다. 초, 중기 신석기 시대에 유럽의 대부분의 지역은 비록 주로 경토(輕土)이긴 했지만 울창한 삼림 지대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3천년 대 초반 새로운 목초지를 끊임없이 먹어치우는 목축용 가축들과 전사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꽃가루 자료 도표는 그들이 숲을 빠르게 불태워 가축용 목초지를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목축 경제는 가축과 사람을 부양하기 위해 농경 경제보다 더 넒은 땅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토지 사용을 극대화 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동과 정보 전달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황소가 끄는 네바퀴 마차를 사용하였다.

 

유럽의 온대림 지역에 있었던 Corded Ware 문화 (주로 중부 유럽), Single Grave 문화 (주로 북서 유럽), Battle Axe 문화 (주로 스웨덴) 등은 Yamnaya 문화에서 기원한 매장 의례와 개별 가족 고분 매장법을 공유하였다. 마찬가지로 농경 요소가 섞인 유목 경제를 영위하였다. Yamnaya 문화의 서부 팽창이 처음에 헝가리 지방을 통과하여 Carpathia 북부를 지날 때 다소의 사회 경제적인 변화를 유발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은 이러한 변화의 원인에 대해 대규모 이주와 지역 개별적인 문화 도입 가설로 오랫동안 나뉘어져 있었다. 다양한 지역에 걸친 매장 문화의 놀랄 만한 유사성은 광범위한 이주가 그 변화의 주된 원동력이었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성의 족외혼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유물의 스트론튬 분석이 하나의 증거이다. 초기에 정착민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 역시 유목 생활에 대한 또다른 증거다. 이동 생활은 무덤에서 때때로 발견되는 돗자리, 텐트, 마차의 사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시기 사람들은 이전의 신석기 주민보다 키가 커졌는데, 이러한 신장의 증가는 기원전 3천년 대 후반과 그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덴마크에서 남성의 평균 신장은 기원전 4천년대 후반의 거석문화 시기에 비교했을 때 기원전 3천년대 후반 7 cm나 커졌다.

 

요약하자면, 기원전 3천년대 동안 새로운 사회, 경제 질서가 유라시아 서부에서 등장하였다. 기원전 3천년대 중반 공통적인 의례와 사회 제도가 우랄산맥에서 북부 유럽에 이르는 온대 저지 지역에서 공유되었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초래되었는지, 그 기저의 사회적, 인구학적 과정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고학적으로 논란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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