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에도 관심을 - 가야연구 맛보기 (14) : 대가야의 쇠퇴
대가야가 경남 서북부와 전남 동부를 차지하고 영역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역의 정치체 발달이 느렸기 때문입니다만 백제와 신라의 영향권 밖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대가야가 성장함에 따라 이윽고 백제와 신라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고, 이 두 국가가 대가야의 생존과 성장을 심각하게 위협하게 됩니다.
신라는 구 진한지역을 복속시키면서 성장하고 있었는데 영남 지역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낙동강에 일찍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5세기 초에 대구 재지세력을 지원하기 시작하여 5세기 후반에는 이미 직접 지배한 것으로 보입니다.(1,2) 대구에 거점을 마련한 신라는 낙동강 너머의 성주와 낙동강 연안의 경산 세력도 포섭하게 되는데 5세기 초반에 이미 신라 토기가 다량 부장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3,4) 대가야의 수도 가까이에 신라가 이미 다가와 있기 때문에 대가야는 성장 시기부터 신라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낙동강 서안에 집중적으로 축조되어 있는 성 유적입니다. 이에 대응하여 신라 역시 낙동강 동안에 성을 쌓은 것 역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5)
그나마 신라와 대가야 사이에는 낙동강이라는 자연 장애물이 있었고, 신라는 왜의 동향도 신경써야 했으며, 신라의 가야 침투 방향 역시 낙동강 서안의 창녕 비자벌이나 김해의 구야국에 쏠려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백제의 확장은 대가야 권역을 직접 노리고 있었습니다.
원래 한성시기 백제는 한반도 내륙지방에 대해서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해안선을 따라 남북으로 황해도와 충청남도의 거점을 확보한 것과 달리 동쪽 방향으로의 확장은 백제 고분이나 취락 유적을 통해 볼 때 포천-가평-홍천-원주-충주가 그 국경선으로 보입니다.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서서 보은-영동을 차지한 것과 비교하면 고구려의 위협 때문이든, 접근이 쉬운 해안선에 집중을 한 것이든 한반도 남부 지역과 내륙 지방에 대해서 주시하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로왕의 패사 이후 고구려에게 내어주게 된 경기지역 대신 백제는 전라 지역 경영에 집중하게 됩니다. 동성왕 20년(498년) 기사에서 탐라를 공격하기 위해 무진주까지 내려갔다는 것을 통해 5세기 말에 백제가 전남 서부까지 차지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고고학적으로 5세기 말을 전후해서 재지세력의 맥이 단절되는 것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6-8)
이 다음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일본서기 계체기 기사입니다. 계체 7년(512년)에 백제가 임나의 상다리(上哆唎), 하다리(下多唎), 사타(娑陀·), 모라(牟婁)의 4현을 청하고 그 다음해인 계체 8년에 추가로 기문(己汶)과 대사(帶沙)를 주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에 대가야가 반발하여 자탄(子呑)과 대사(帶沙)에 성을 쌓고 봉수대를 설치하였으며 이열비(爾列比)와 마수비(麻須比)에도 성을 쌓고 마차해(麻且奚)와 추봉(推封)에 이어 신라를 핍박하였다 합니다. 이와 별도로 계체 23년에 매우 비슷한 기사가 별도로 존재하는데 백제가 가라의 다사진(多沙津)을 청해 받아내자 가라왕이 원한을 품고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어 신라왕녀를 아내로 맞이하였다고 합니다. 가라와 신라 사이의 혼인에 대한 내용이 삼국사기 법흥왕 9년(522년)에 있어 일본서기의 기년이나 전승 주체가 혼란스럽긴 하지만 실제 역사를 반영하는 기사로 보고 있습니다, 즉, 주체를 백제로 돌려놓고 생각해 본다면 6세기 초 백제가 왜와의 교류를 위해서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 기존에 영유하던 대가야 세력과 충돌한 것을 묘사했다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계체 23년에 다시 한번 기록한 것은 계체 7년부터 23년에 걸쳐 사건이 일어난 것을 암시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때 채록된 지명의 비정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존재합니다만 섬진강 유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9,10) 사타를 순천의 옛 지명인 사평에, 모라를 광양의 옛 지명인 마로에, 대사를 하동의 옛 지명인 한다사에 연결시키고, 이에 근거해 상다리/하다리를 여수 인근으로 비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대가야는 전남 동부의 섬진강 유역을 상실함으로써 바다로 나가는 교통로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내륙국가화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6세기 중엽에 섬진강과 남해안 지역에 백제계 산성과 고분이 축조되는 현상이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12) 이제 대가야에게는 황강 유역과 남강 상류 유역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1. 정창희(2005), "5~6세기 대구 낙동강연안 정치체의 구조와 동향", 경북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 김용성(2011), "대구 서북부 고총과 그 축조집단의 성격", '중앙고고연구', 8, 156-187.
3. 장용석(2007), "임당유적을 통해 본 경산지역 고대 정치체의 형성과 변천", '야외고고학', 3, 44-87.
4. 김세기(2014), "고분자료로 본 삼국시대 성주지역의 정치적 성격", '신라문화', 43, 1-27.
5. 조효식(2006), "낙동강 중류역 삼국시대 성곽의 분류와 특징", '고문화', 67, 71-92.
6. 서현주(2011), "영산강유역 토기문화의 변천 양상과 백제화과정", '백제학보', 6, 79-105.
7. 김낙중(2013), "토기를 통해 본 고대 영산강유역 사회와 백제의 관계", '백제학보', 9, 130-167.
8. 김기섭(2014), "백제의 영역확장과 마한병탄", '백제학보', 11, 91-110.
9. 김주성(2014), "임나4현과 기문-대사의 위치비정 연구사", '초등교육연구', 25, 45-57.
10. 백승충(2012), "'임나 4현'의 위치 비정", '역사와 경계', 85, 49-93.
11. 김재홍(2012), "전북 동부지역 백제, 가야, 신라의 지역지배", '한국상고사학보', 78, 113-134.
12. 박천수(2009), "호남 동부지역을 둘러싼 대가야와 백제", '한국상고사학보', 65, 107-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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