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중원) 고구려비 건립 시기에 대해서.

 충주의 중원고구려비는 잘 아시다시피 고구려의 한반도 중부 이남 진출을 보여주는 지표이자, 고구려와 신라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주는 금석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랜기간 비바람을 맞아 마모가 심해 판독할 수 있는 글자는 전체의 1/3도 채 되지 않는 것이 아쉬운 일이긴 합니다만 원체 기록이 부족한 고대사를 채워줄 소중한 존재임은 분명하리라 봅니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금석문이 실상은 언제 건립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 또한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그나마 판독가능한 十二月卄三(五?)日甲寅이라는 간지를 기준으로 12월 23일 갑인을 채택하면 449년(장수왕 37년, 눌지왕 33년) 480년(장수왕 68년, 소지왕 2년) 506년(문자왕 15년, 지증왕 7년) 건립을 생각할 수 있겠고 12월 25일 갑인을 채택하면 403년(광개토왕 13년, 실성왕 2년) 470년(장수왕 58년, 자비왕 13년) 496년(문자왕 5년, 소지왕 18년)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1)

이후 비문의 판독은 각 연구자들이 정황논리에 따라 건립 시기를 비정하는 시기를 먼저 정하고 그에 맞는 논리를 만들어내는 느낌이 강합니다. 예를 들어 高麗太王祖王의 경우 문자명왕 건립설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문자명왕과 장수왕의 관계를 직접 드러내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지만 장수왕 건립설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선대왕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반론하고 있습니다. 비문에 나오는 太子에 대한 해석에서도 입장을 달리하는데, 장수왕의 적자인 조다는 일찍 죽었고, 장수왕대에 태자책봉 기사가 없는 것을 가리켜 장수왕으로 볼 수 없다는 문자명왕파의 논리에 대해 장수왕 지지파는 다른 왕자를 태자로 높였을 것이라는 논리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반대로 장수왕 지지파(중 450년 이전 건립설)의 경우 장수왕 말기부터 신라가 고구려에 적대하는 기사가 발생하고 있는데 고구려비의 건립 목적이 친선임이 분명하며 고구려가 신라보다 우위에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어떻게 그 후대에 건립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느냐로 공격하면 5세기 말기 건립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고구려가 대 백제 전선에 집중하기 위해서 신라에 구애한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하는 상황입니다.(1-6)

이는 고구려의 남한강 상류 영유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문제까지 얽혀 있습니다. 충주에 고구려비를 건립하기 위해서는 일단 고구려가 충주를 점거해야만 한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475년 이후에 고구려가 충주로 진출했다면 자연스레 고구려비의 건립 연도는 그 이후로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년단위의 국경변화를 고고학적인 유물로 판단하는 것이 조심스러울 수도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현재까지는 고구려가 5세기 중반 이전에 충주에 진출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아직 부족한 것 같습니다.

첫째로 충주 탑평리 유적에서 4세기 중반에서 5세기에 걸친 백제 유적이 발굴되었기 때문입니다.(7) 적어도 광개토대왕의 남정 시기에 충주가 고구려 영역이 된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둘째로 충주로 가는 남한강 수계에서 5세기 중반까지 백제가 점유한 것으로 보이는 유적과 유물이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8-10) 원주 부론면 법천리에서 백제식 금제 귀고리와 횡혈식 석실분이 나타나고 있는데, 고구려의 한반도 남부 진출이 주요 교통로를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11,12) 남한강을 통제하게 된 475년 이후 충주 진출이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셋째로, 정황증거이긴 하지만 고구려의 남한강과 금강 지배가 길게 지속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경기와 충청지역에 고구려가 진출한 흔적은 분명히 나타나지만 그 범위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비정되고 있으며 적은 수의 고분이 산발적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13-15) 물론 앞으로 고고학적인 발굴이 더 진행되면 현재보다 더 자세한 정황이 드러나겠지만 분명 1세기가 넘는 기간동안의 점유를 상상하기에는 아직은 부족한 상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충주의 지정학적인 중요성 때문에 고구려가 그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5세기 중엽 이전에 충주로 진출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서 지방의 예족 집단을 동화하면서 내륙길을 통해 충주와 원 고구려 영토가 연결되었을 겁니다.(16,17) 혹은 신라의 후방 지원에 힘입어 충주에 진출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아마추어적인 시각으로는 아직 충주 고구려비의 건립 시기 확정에는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습니다.

1. 서지영 (2012), "5세기 나-려 관계변화와 <중원고구려비>의 건립", '한국고대사연구', 68, 101-136.
2. 박진석 (2000), "중원고구려비의 건립연도 고증", '고구려발해연구', 10, 315-341.
3. 이도학 (2000), "중원고구려비의 건립 목적", '고구려발해연구', 10, 271-293.
4. 키무라 마코토 (2000), "중원고구려비의 입비년에 관해서", '고구려발해연구', 10, 301-307.
5. 박성현 (2010), "6세기 초 고구려-신라의 화약과 정계", '역사와 현실', 76, 203-237.
6. 박찬흥 (2013), "중원고구려비의 건립 목적과 신라의 위상", '한국사학보', 51, 145-165.
7. 중원문화재연구소 (2009), 충주탑평리유적 시굴조사보고서 
8. 성정용 (2001), "4~5세기 백제의 지방지배", '한국고대사학회', 24, 77-116.
9. 이인재 (2004), "법천리 고분군을 통해서 본 삼국시대 원주와 마한-백제와의 관계", '동방학지', 126, 1-29.
10. 심재연 (2009), "한성백제기의 영동-영서", '고고학', 8, 51-68.
11. 백종오 (2014), "중원지역 고구려 유적 유물의 검토", '고구려발해연구', 50, 221-255.
12. 최종택 (2014), "남한지역 고구려유적 연구현황과 과제", '고구려발해연구', 50, 67-95.
13. 안신원 (2010), "최근 한강 이남에서 발견된 고구려계 고분", '고구려발해연구', 36, 71-96.
14. 김정인 (2011), "충주지역 고구려계 고분과 그 성격", '중원문화재연구', 5, 11-39.
15. 박중균 (2011), "중원 고분유적의 검토", '선사와 고대', 34, 129-173.
16. 서영일 (2003), "한성 백제의 남한강수로 개척과 경영", '문화사학', 20, 15-50.
17. 여호규 (2012), "4세기 후반~5세기 초엽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 변천", '역사와 현실', 84, 169-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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