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에도 관심을 - 가야연구 맛보기 (13) : 대가야의 확장과 리즈시절
앞서 언급했다시피 신라가 이미 확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령의 대가야가 북쪽의 성주 방향과 동쪽의 대구 방향으로 진출할 수는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낙동강 수계의 하류 방향으로는 창녕의 교동/송현동 고분군 세력(비화가야)이 독자적으로 발달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가야 세력은 필연적으로 남서쪽 방향으로 확장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래 경남 서부와 호남 동부에는 4세기 이전에는 대형 고분군도 등장하지 않고, 위세품도 빈약해 정치체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함께 토광묘나 옹관묘와 같은 과거의 묘제나 삼각점토대토기가 오랜 기간 남아 있는 등 발전 양상이 주변에 비해 뒤처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1) 따라서 정치체 발전이 미약한 경남 서부와 호남 동부지역으로 쉽게 대가야 양식이 확장되거나 대가야의 정치력이 침투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대가야 유물이 전북 부안, 전남 순천, 경남 창원, 경북 구미에 이르기까지 널리 분포하는 것을 통해서 대가야의 영향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2)
대가야 유물의 출토 지역 |
대가야의 성장은 중국 측 기록으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479년 남제에 가라국 국왕 하지가 조공 사절을 보낸 것입니다. 이 가라의 주체에 대해서 김해 구야국이나 함안 아라국으로 파악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당대에 쇠퇴하고 있던 김해나 함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함안보다는 급속도로 발전하던 고령으로 파악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3) 내륙에 위치한 고령이 중국에 조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의 지원에 힘입었을 수도 있으나 막 수도를 상실하고 쫓겨 내려온 백제가 그런 정신이 있었을지 의문이며, 백제와 공동으로 조공한 것이 아닌 대가야의 단독 조공이므로 독자적인 루트로 조공에 성공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마도 중국과 교섭에 익숙한 영산강의 마한 세력이나 앞으로 대가야의 영향권에 들어오는 섬진강길을 따라 조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가야의 성장에 따라 고령지역의 고분의 크기는 점차 커지게 되고 주변 지역에서도 고령 지역의 유물이 다량 부장되며 고령식 고분군이 형성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창과 함양에서 대가야 양식의 고분이 5세기 말에 축조되기 시작하고 원래 창녕 지역과 가까웠던 합천에서도 옥전 고분군이 후반에 고령 지역 문화로 재편되면서 그와 별도로 반계제 고분군이 축조되기 시작합니다.(4,5) 산청 지역은 원래 소가야 권역의 중심이었으나 마찬가지로 북부부터 대가야의 영향을 받기 시작해 6세기 초엽에는 소가야 양식이 고성 방향으로 물러나면서 대가야 권역에 포함되게 됩니다.(6,7)
함양방향으로 성장한 대가야는 5세기 말~6세기 초에 소백산맥을 넘어 남원과 순천 방향으로도 진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남원 두락리와 순천 운평리에서 대가야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고학 양상만으로 어느 정치체의 영토를 특정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점령이나 정복이 아니라 교류나 도입에 의해서 유사한 유물과 묘제가 나타날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형태를 서로 면밀히 분류한다면 대가야의 최소한의 영역 정도는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한상은 이 중에서 대가야의 유물 부장 형태를 1) 대가야양식 일색의 토기류가 보이는 지역과, 2) 상대적으로 유물 양상이 단순하고 짧은 기간의 대가야 영향을 나타내는 지역, 3) 대가야의 유물이 아라가야나 소가야 유물과 함께 공반되는 지역을 나누고 1-2에 해당하는 지역을 대가야의 영역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습니다.(7,8) 이와 더불어 장수, 진안 지역으로도 대가야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습니다.(9)
함양방향으로 성장한 대가야는 5세기 말~6세기 초에 소백산맥을 넘어 남원과 순천 방향으로도 진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남원 두락리와 순천 운평리에서 대가야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고학 양상만으로 어느 정치체의 영토를 특정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점령이나 정복이 아니라 교류나 도입에 의해서 유사한 유물과 묘제가 나타날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형태를 서로 면밀히 분류한다면 대가야의 최소한의 영역 정도는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한상은 이 중에서 대가야의 유물 부장 형태를 1) 대가야양식 일색의 토기류가 보이는 지역과, 2) 상대적으로 유물 양상이 단순하고 짧은 기간의 대가야 영향을 나타내는 지역, 3) 대가야의 유물이 아라가야나 소가야 유물과 함께 공반되는 지역을 나누고 1-2에 해당하는 지역을 대가야의 영역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습니다.(7,8) 이와 더불어 장수, 진안 지역으로도 대가야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습니다.(9)
이렇게 성장을 거듭한 대가야는 어느 정도 고대국가의 궤도에 올라선 것으로 생각됩니다. 합천의 저포리 유적에서 하부사리리(下部思利利)라는 명문이 적힌 토기가 발굴되었는데 이중 하부가 부 이름이고 사리리가 이름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우륵의 악곡 명 중 하가라도가 이 하부와 연결된다면 대가야는 다른 삼국과 유사한 적어도 상부와 하부의 2부 체제가 있었다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토기에서 대왕이라는 명문이 찍혀 있었던 것을 통해서 대가야의 수장층이 주변 세력보다 높은 위세를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0,11)
6세기의 한반도엔 익숙한 삼국 이외에도 대가야라는 또 하나의 고대 국가가 존재했습니다. 이 국가는 등장시기는 비교적 느렸지만 육로와 수로 교통로를 따라서 확장, 확산하여 한반도 남부의 한 가운데에 일국을 건설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행운과 성공은 여기까지였습니다. 망국 일보직전에서 되살아난 백제와 낙동강 동부를 석권한 신라가 가야 권역에 침투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대강 그려본 대가야의 권역>
- 노란선 : 교역권, - 보라색원 : 대가야의 발흥지, - 연한귤색 : 대가야권역, - 화살표 : 대가야 문화 확산 방향.
1. 이동희 (2011), "전남 동부지역 가야문화의 기원과 변천", '백제문화', 45, 5-11.
2. 이희준 (2008), "대가야 토기 양식 확산 재론", '영남학', 13, 111-164.
3. 김태식 (2006), "중국 남제와의 외교교섭", '한국학연구원 학술총서', 8, 121-127.
4. 박천수 (2008), "역사 속의 고령과 고령 사람들; 고고학을 통해 본 대가야사", '퇴계학과 유교문화', 42, 5-52.
5. 조재윤 (2012), "5~6세기 가야고분의 구조를 통해 본 지역성 연구",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6. 박은지 (2012), "5~6세기 산청,함양지역의 토기 양식 변화", 경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7. 하승철 (2000), "가야서남부지역 출토 도질토기에 대한 일고찰", '고문화', 56, 93-146.
8. 이한상 (2013), "대가야양식 유물의 분포양상과 의미", '신라문화', 41, 31-55.
9. 전상학 (2013), "진안고원 가야의 지역성", '호남고고학보', 43, 36-67.
10. 김세기 (2007), "대가야연맹에서 고대국가 대가야국으로", '한국학연구원 학술총서', 10, 69-98.
11. 이형기 (2006), "대가야의 발전과 정치체제", '한국학연구원 학술대회', 4, 3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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