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에도 관심을 - 가야연구 맛보기 (11) : 대가야(반파국)의 기원

 변한 지역에서 독보적으로 발전해 나가던 금관국(구야국)이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일격을 받아 패배한 사건은 금관국의 위세와 지위를 뒤흔든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고구려나 백제가 국운이 흔들린 패배에도 다시 국가를 재건, 영역을 확장해 나간 것과 달리 금관국은 다시 그 지위를 회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건은 금관국에게는 불행한 역사적 사건이겠으나 다른 변한 소국들에게는 새로운 기회로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소국에만 머물러 있던 각 변한 지역이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빠른 발전 양상의 원인은 한반도에서 가장 선진적이던 고구려가 한반도 중부지역에 진출함에 따라 발달된 기술이나 문화를 접한 덕분일 수 있습니다. 혹은 고구려의 공격에 임진강 북부와 영서 일대를 상실하고 한반도 남부 지역과 왜에 눈을 돌리게 된 백제의 영향일 수도 있지요. 아니면 고구려와의 동맹을 통해 빠른 속도로 발전, 확장하는 사로국에 대한 저항에 의한 것일 수도 있으며, 중부지역과 금관국을 뒤흔들면서 생긴 인적 자원의 급격한 이동에서 발생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4세기의 세기말에서 고령은 입지 상 기회의 땅이 된 모양입니다. 지정학적 위치상 변한 지역에서는 고구려와 백제 소식을 가장 빨리 접할 수 있는 곳인 반면에 옛 맹주인 금관국에서는 가장 멀어 성장에 유리하기 때문이겠지요.

대가야는 원래 가야의 이름을 가지고 있던 금관국의 이름을 빼앗아 스스로를 가라라고 부른 모양입니다만 원 이름은 반파국으로 보입니다. 이에 삼국지의 변진반로국과 이름이 유사해 원래 반로국이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연구진들이 많습니다만 이를 증명해 줄 고고학 유물이 출토되지 않는한 영원히 해명되지 못하겠지요. 고령의 4세기 이전 고고학 자료는 변변치 않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매우 적은데, 개진면 반운리에서 일부 와질토기와 목관묘가 확인된 것 이외에는 매우 작은 소국 혹은 그 이하(?)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2)

고령의 최초의 발전을 보여주는 지표는 쾌빈동의 목곽묘입니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조영된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고령의 발전을 보여주는 고분군은 지산동 고분군입니다. 지산동 고분군은 5세기 초반에 조성되기 시작하며 대가야 권역에서 가장 우세한 고분 형태를 보여주며, 대가야 고분 형식의 지표인 수혈식석곽묘가 나타난 곳도 이곳이기 때문에 지산동 축조세력이 대가야의 지배집단으로 보고 있습니다. 73호분, 35호분, 32호분, 44호분 순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특이한 점은 5세기 전반으로 편년되는 고분들이 매우 많다는 것입니다. 이는 복수의 집단이 서로 비슷한 위계를 가지고 동일한 묘역을 공유해서 발생한 것으로 해석됩니다.(3,4) 이런 현상은 44호분 이후에나 사라지게 되며 이에 5세기 이후에 대가야 내부의 위계가 대충 마무리 되고 본격적인 국가 발달이 진행되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특색이 없었던 고령 지방의 물질 문화도 대가야 양식이라는 특색있는 문화로 발전해 나가게 됩니다.

수혈식석곽묘

두줄요약
ㄱ. 대가야는 고령에서 5세기 초에 건국되었을 것으로 생각됨.
ㄴ. 처음에는 반파국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후대에 가라라는 이름을 자칭하게 됨
 

1. 백승충 (2008), "가야문화권의 성립과 그 의미", '영남학' 13,61-109.
2. 백승충 (2006), "대가야의 건국과 성장", '한국학연구원 학술대회' 4,13-21.
3. 이한상 (2013), "대가야양식 유물의 분포양상과 의미", '신라문화' 41,31-55.
4. 박천수 (2009), "고고학을 통해 본 대가야사", '퇴계학과 유교문화' 42, 5-52.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고대 해수면 변화 (뒤늦게 조선란티스 열차에 탑승하다.)

가야에도 관심을 - 가야연구 맛보기 (22) : 신라의 낙동강 하류 공략

가야에도 관심을 - 가야연구 맛보기 (12) : 대가야의 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