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에도 관심을 - 가야연구 맛보기 (9) : 가락국(구야국)의 몰락-1
사로국과 구야국, 혹은 초기 국가 단계로 들어가면서 국호를 일신했다고 본다면 신라와 가락국은 나라 꼴을 갖추고 아직 발전이 느리거나 세가 약한 주변부를 자신의 세력권에 집어 넣기 시작했을 겁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기년과 기사 내용을 받아들이기에는 고고학적 자료와 맞지 않고, 기년을 수정해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연구진마다 몇 갑자를 옮겨야 하는지, 극단적으로 아예 기년을 무시하고 기사 내용만 가져와서 재구성할지 통일이 되지 않아 신라가 언제 어디서 가락국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고고학적 자료로 보았을 때 가락국과 신라의 발전이 엇비슷한 점을 생각해 서로 비슷하게 확장했다면 부산이 가락국의 세력권에 완전히 들어가고, 경주와 비슷한 수준의 정치체가 있었던 울산 하대 유적이 위축되는 4세기에 양산 근처에서 서로 국경을 마주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1,2)
이에 삼국사기 탈해왕조에서 가야와 양산-물금으로 비정되는 황산진에서 격돌한 것을 이 때의 일로 비정하고 있습니다만 이 역시 고구려의 남정 이전이라 볼 수도 있지만, 고구려 남정 이후 가락국을 신라가 압박하는 과정이라고 본 분도 있습니다.(3) 뭐 어찌됐든 양산 근처에서 신라와 가락국이 대치했다는 것은 있었을 법 합니다. 이 시기 갑옷이나 대도와 같은 무기류의 부장이 증가추세에 있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가락국은 서로 긴밀했던 사이인 왜의 병력을 동원, 신라에 대한 공세를 계획합니다. 동원된 병력은 1만에서 2만 5천이라고 추정하는 분이 있습니다만 과연 그 당시에 이 정도의 병력을 보급 가능할 정도로 가락국이 성장했는지, 그와 비슷하게 성장한 신라도 엇비슷하게 영토와 인구를 보유했는지는 엄밀한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4) 아무튼 왜의 병력 파견으로 수적 우위를 확보한 가락국은 신라를 밀어붙일 수 있게 되었고 이에 신라가 고구려에 손을 벌리고 이를 광개토대왕이 수용, 전격적인 참전이 이루어졌음을 광개토대왕비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백제가 가야와 왜를 사주했다는 견해도 있는데 이 시기 가야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을 확신할 수 있는 유물이 없고, 아직 백제가 왜에 대한 영향력이 없었을 때라 이를 인정할만한 근거 제시가 요구됩니다.
고구려의 참전
광개토대왕비의 경자년 기사는 온갖 떡밥을 양성하고 있어 오히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각 연구진들이 백가쟁명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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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 시기의 일이 고구려본기와 신라본기에 적혀져 있지 않다는 것부터가 문제를 발생시키는데, 당대의 금석문인 광개토대왕비의 기사를 신뢰하는 분들이 다수이긴 하지만 내용 자체가 과장이나 윤색, 혹은 허구가 포함되어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6) 이에 소소하게 고구려가 5만이나 파병했는지를 의문시하는 것부터, 크게는 고구려가 가야나 왜의 방면으로 얻은 이익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신라내의 왜의 세력을 일소한 것에 그친 실제로는 실패한 작전이었다는 주장까지도 나오는 형편입니다.(7,8)
고구려군은 한강 지역에 있던 병력이 파견되었을 것으로 가정해 충주-죽령을 거쳐 신라의 영역으로 돌입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는 왜군이 신라의 동쪽 해안을 침범했기 때문에 고구려군이 서북쪽에서 진입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상상한 것으로 보이는데, 가야-왜 연합군이 수륙 양동 작전을 부드럽게 성공시킬 정도의 역량을 가졌는지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4,9) 또한 신라가 경북 내륙지역보다는 강원도 해안지방의 진출이 선행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고구려의 원정 이후 강원도-경북 해안지방에 고구려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을 통해 동해안 길의 가능성도 다루어주었으면 좋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영남지역의 패권을 가리기 위한 가락국과 신라의 경쟁은 먼저 왜의 지원을 끌어낸 가락국이 우세를 점했으나 신라의 고구려 신속을 매개로 요청한 고구려군에 의해 무게추가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1. 김태식, "신라와 전기 가야의 관계사", '한국고대사연구', 2010, pp275-317.
2. 최충기, "울산지역 초기국가의 형성과 전개", 석사학위논문.
3. 선석열, "삼국시대 낙동강 하구의 황산진", '역사와 세계', 2012, pp77-104.
4. 유우창, "고구려남정 이후 가락국과 신라 관계의 변화", '한국고대사연구', 2010, pp129-162.
5. 김태식, "4세기의 한일관계사 : 광개토왕릉비문의 왜군문제를 중심으로", '한일역사 공동연구보고서', 2005, pp7-89.
6. 강종훈, "한국 고대 금석문 자료에 대한 사료 비판론", '한국고대사연구', 2012, pp301-334.
7. 송원영, "금관가야와 광개토왕비문 경자년 남정기사", 석사학위논문.
8. 이도학, "광개토대왕의 남방 정책과 한반도 제국 및 왜의 동향", '한국고대사연구', 2012, pp159-199.
9. 허재혁, "고구려 남정 이후 김해지역의 정치적 동향", '지역과 역사', 2003, pp131-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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