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에도 관심을 - 가야연구 맛보기 (10) : 구야국의 몰락-2
고구려군의 진격과 종발성
가야의 역사는 기록이 없는 부분은 없는대로 문제지만 기록이 있는 부분은 있는대로 여러 문제를 발생시킨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많은 연구진들의 고뇌도 함께 이해되고 있습니다.
앞서 보여드린 광개토대왕비의 경자년조 구절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구절 구절마다 이설이 존재하는데 남거성에서 신라성 사이에 왜가 가득차 있었다고 해석하는 경우와 남거성을 거쳐서 신라성에 이르니 그 곳에 왜가 가득 차 있었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거성의 위치를 알면 해석에 도움이 되겠으나 합의가 된 부분은 신라성이 경주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점 밖에 없지요. 왜군이 퇴각하는 것을 쫓아 종발성에 이르렀으니 그 공세의 종말점에 종발성이 자리할텐데 이 곳이 경남 김해라고 보는 견해와 경북 고령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는 가락국을 가라로 부를 수 있지만, 대가야도 스스로를 가라로 김해를 남가라로 지칭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소수설인 고령설의 근거를 말씀드리자면 고구려군이 뒤(=퇴각로)를 끊었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동쪽이나 남쪽으로 도망가지는 못할테니 피할 곳은 서쪽 밖에 없으며, 김해라고 본다면 앞서는 군사적으로 싸우다가 고구려군이 도착하자 스스로 귀부하고 이를 고구려가 받아들이는 것이 부자연스럽고, 이후 대가야가 괄목적으로 성장하므로 이때의 귀부가 도움이 되었을 것 등을 말하고 있습니다.(2,3) 개인적으로는 다른 것은 인정할 수 있어도 고구려 침공 시기에 고령이 스스로를 가라로 자칭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근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수설인 김해의 근거에 대해서는 굳이 열거할 이유도 없으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
더 나아가 종발성을 성 이름으로 보는 경우와 '성을 공격함에 따라'로 해석을 해 버리는 경우가 있으며, 종발성을 성 이름으로 본다면 수도를 가리키는 것인지 변경의 성 이름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견해차가 있습니다. 또한 임나가라를 임나가라 그대로 받아들일지, 임나+가라로 받아들일지, 그렇다면 임나는 어디이고 가라는 어디인지도 문제가 됩니다. 이 모든 문제가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서 종발성이 어디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것이죠. 흥미로운 견해로 종발성을 사발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김해의 분산성이나 봉황동 성지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주장도 소개해 드립니다.(4)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
안라인수병이라는 구절을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해서도 중구난방 상태입니다. 위의 해석에서는 순라병을 두어라고 두루뭉실하게 넘어갔는데 이를 아라가야의 병사로 해석할지, 나인을 두어 수병으로 삼았다로 해석할지가 크게 갈리는 부분이고, 나인을 두었다는 것이 고구려병사의 일부를 점령군으로 둔 것인지, 신라군을 사용한 것인지, 귀복한 가락국에게 다시 돌려주었다는 의미인지 합의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고고학적으로 안라국의 성장은 고구려의 남정 이후에나 일어나는 일이므로 안라국의 병사를 병사로 사용하는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고, 가락국이 전쟁 전후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면 이후의 가락국 쇠퇴 현상을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통상적으로 고구려군 혹은 신라군이 가락국에 진주한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고구려 남정의 결과
가장 큰 쟁점은 고구려의 남정이 과연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한쪽 극단은 고구려의 남정으로 가락국이 멸망하고 주변 가야와 일본으로 대거 도피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고 반대쪽 극단은 고구려의 남정은 가락국 인근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주장까지 스펙트럼이 매우 넓습니다. 가락국의 멸망에 초점을 맞추는 의견은 김해 대성동의 거대 고분군 축조가 단절되고 비슷한 시기에 일본의 스에키 토기 생산이 시작되며(최근 견해는 스에키 토기 생산은 4세기 말에 이미 생산이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다른 경남 지역의 발전이 시작되는 것을 근거로 들며, 반대쪽에서는 고구려 계열의 유물이 김해에 전혀 침투되지 않고 있고, 다른 김해 고분군은 그대로 축조되며 심지어 대성동 고분도 그 이후에 꾸준히 축조되고 있다는 점, 김해 특이적인 묘제와 토기 문화가 그대로 유지된다는 점, 가락국의 멸망은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하는 시점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고고학적인 특이점은 그 동안 부산보다 더 우세했던 김해의 위상이 사라지고 오히려 부산 복천동 고분의 위세가 더 커지게 됩니다. 이를 김해-부산 연맹의 주체가 부산으로 옮겨간 것으로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내부 부장품이 가락국에서 신라로 급격하게 변동하는 것을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이렇게 급 성장한 복천동 고분군은 이후 연산동으로 묘역이 옮겨가게 되며 이후 점차 고분의 크기가 작아지게 됩니다.(5,6) 신라의 지배층으로 포섭되었거나 반대로 토사구팽되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토사구팽 되었다면 이후 가락국이 쉽사리 항복하려 들지는 않았겠지요.
김해의 대성동 거대 목곽묘 축조는 중단되지만 그 외의 고분군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김해 고유의 문화는 그대로 유지되지만, 부산과 창원 지역에 대한 영향력은 상실한 것으로 파악됩니다.(7) 이와 함께 가락국과 왜의 교류가 급속도로 단절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번 전쟁의 전후 처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8) 아마도 낙동강 하구를 통제하거나 신라로의 교역을 강요하는 등의 사태가 벌어졌겠지요.
이와 때를 같이 하여 고령, 함안, 고성, 창녕에서 본격적으로 거대 고분이 축조되며 느슨한 경남 공통 문화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토기 문화를 만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고구려의 참전이 가락국에게는 통탄할 일이지만 그 외의 경남 지역에는 선진 문물의 충격과 가락국의 간섭에서 벗어나게 해 준 좋은 기회였던 셈이죠.
세줄 요약
1. 가락국이 나라가 멸망할 정도의 궤멸적인 타격을 입지는 않았겠지만 그 동안 신라와 대등했던 위상은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2. 가락국과 왜의 교류가 단절된다.
3. 김해 외의 경남 지방이 급속도로 나라 꼴을 갖추어 가기 시작한다.
1. 김태식, "4세기의 한일관계사 : 광개토왕릉비문의 왜군문제를 중심으로", '한일역사 공동연구보고서', 2005, pp`7-89.
2. 유우창, "'가야 고구려 동맹'의 형성과 추이", '역사와 세계', 2013, pp1-34.
3. 권주현, "삼국사기에 보이는 4~5세기 가야와 삼국과의 관계", '신라문화', 2011, pp53-84.
4. 송원영, "금관가야와 광개토왕비문 경자년 남정기사 : 김해지역 고고학 발굴성과를 중심으로", 2010, 석사학위논문.
5. 김두철, "부산지역 고분문화의 추이 -가야에서 신라로-", '항도부산', 2003, pp245-295.
6. 신경철, 홍보식, "부산의 삼한-삼국시대 고고학적 연구의 회고와 전망", '항도부산', 2007, pp51-85.
7. 김현미, "탁순국의 성립과 대외관계의 추이", 2005, 석사학위논문.
8. 홍보식, "한반도 남부지역의 왜계 요소 : 기원후 3~6세기대를 중심으로", '한국고고사연구', 2006, pp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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