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초기 역사 문제들을 한방에 해결하는 법(?)

 권순홍(2015), "조선 전기의 고구려 초기 도성 위치 비정과 그 실상", '사림' 53, 183-201.



<전략>

가) 성주(평안남도 성천군)는 본래 비류왕 송양의 옛 도읍이다. (고려사 지리지)
나) 성천도호부는 (중략) 본래 비류왕 송양의 옛 도읍이다. (세종실록 지리지 안주목)
다) 성천도호부는 본래 비류왕 송양의 옛 도읍이다. 고구려 시조 동명왕이 북부여로부터 와서 졸본천에 도읍할 때, 송양이 그 나라를 바치고 투항하여 마침내 다물도를 두고 송양을 다물후로 봉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안도)

... 이를 통해서 조선 전기에는 성천을 송양의 옛 도읍, 나아가서는 고구려 최초의 도읍인 졸본으로 인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졸본을 성천으로 비정한 것이 조선 전기에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혹자들이 졸본을 화주和州(함경남도 금야金野) 혹은 성주에 비정하는 것에 대해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이에 따라 이미 13세기 이전에 졸본을 성천으로 비정하는 경향이 일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부식이 졸본의 위치를 모른다고 고백하고 일연이 성천은 아니라고 부정했던 것은 성천설의 불합리성을 방증한 셈이지만, 위와 같이 조선 전기에 성천이 다시금 주목된 점을 감안하면 또 아주 근거 없는 낭설은 아닐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성천에 오늘날까지도 고구려 건도지建都地인 졸본과 관련된 여러 지명들이 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비류강과 흘골산성紇骨山城이란 지명이다... 주지하듯이 비류강은 고구려의 건국설화에 등장하는 비류수와 이름이 같고, 흘골산성은 『위서』에서 주몽의 건도지로 전하는 흘승골성紇升骨城과 통한다...

<중략>

국내성의 위치를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1486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이었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의주의 고적부분에서 『삼국사기』에 나타난 유리왕 22년 천도기사를 옮기면서 국내성을 의주로 비정하였다. 이후 박상朴祥의 『동국사략』에서도 그 위치를 의주로 비정하였고, 정약용의 『강역고』에 전하는 권근의 『삼국사략』에서도 국내성을 의주로 비정했던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에는 대체로 국내성을 의주로 비정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후 17세기 한백겸의 『동국지리지』에서도 국내성의 위치를 인주(의주)로 비정하는 등 이러한 『동국여지승람』의 인식은 상당 기간 동안 이어져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동국여지승람』의 찬자가 의주를 국내성으로 비정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는 점이다.

지금 정인지의 『고려 지리지』를 살피니, '인주에 장성의 터가 있는데 덕종조에 유소가 쌓은 것으로 주의 압록강 입해처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또 『병지』를 살피니, '서해 바닷가에서 시작되는데 옛 국내성의 경계'라고 한다. 압록강 입해처가 곧 국내성이니 마땅히 옛 인주의 경내에 있다. 김부식이 『고구려지지』에서 말하길 '국내성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나 압록 이북의 한 현토군의 경계, 요의 동경 요약의 동쪽'이라 하니 누가 옳은지 자세하지 않다. 잠시 정인지의 설을 좇아 여기에 붙인다...

이것은 다음의 몇 가지 사료들을 통해 추적해갈 수 있다.

라) 영국공 이적이 칙을 받들어 고구려의 여러 성에 도독부와 주현을 두면서 목록에 이르길, '압록 이북에 이미 항복한 성이 11성인데, 그 하나가 국내성이다. 평양에서 여기까지 17역'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마) 마자수는 일명 압록수이다. 그 근원이 백산에서 나와 국내성 남쪽을 지나고 또 서쪽에서 한 물줄기와 합하니 즉 염난수이다. 두 물줄기가 합류하여 서남쪽으로 안평성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통전)
바)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다. 또 소수맥이 있는데, 구려가 나라를 세우고 대수에 의지해 산다. 서안평현 북쪽에 소수가 있어 남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구려의 별종이 소수에 의지해 나라를 세우니, 인하여 그를 이름 하길 소수맥이라 한다. (삼국지)...


조선 초기 고구려 영역 인식아래에서 삼국사기 기록을 해석해 본다면?

A. 고구려사는 100% 한국사입니다.

졸본도, 국내성도 다 한반도 안에 위치하기 때문입니다.

B. 온조가 남쪽으로 도망가서 백제를 건국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백제가 고구려에 기원을 두고 있다면 중간의 낙랑을 우회해서 어떻게 한강 근처로 올 수 있는가에 대한 내용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그러나 졸본이 평안남도 성천에 있었으면 전혀 의문스럽지 않습니다.

C. 부여의 낙랑군 공격이 자연스러워집니다.

후한서에 기록된 부여의 낙랑군 공격은 고구려가 환인/집안을 차지하고 있다는 가정에서는 고구려의 중심지를 통과하지 않는 한 부여가 낙랑을 공격하기 마땅치 않습니다. 그러나 국내성이 의주가 되면 (그래도 고구려 영내를 통과하긴 해야 합니다만) 압록강 중류를 도하해 낙랑을 공격할 수 있게 됩니다.

D. 동천왕의 평양 천도가 이상하지 않습니다.

동천왕이 뜬금없이 평양으로 천도하는데 대개는 현재의 평양이 아닌 보통명사로 재해석합니다만, 원래 고구려의 첫 도읍이 평양에서 멀지 않은 성천이라면 평양 인근으로 가는 것이 그리 어색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고구려의 수도가 항상 중국의 거점 영역인 평양, 단둥(서안평)과 매우 가깝다는 사소한(?) 문제는 있습니다만 그건 제가 알 바 아닙니다. 오늘 어느 분이 고대사에 대해 무리한 소리를 하시길래 문헌 자료만 가지고 생각하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는지 별도의 예를 만들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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