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에도 관심을 - 가야연구 맛보기 (19) : 포상팔국의 난 (3) - 대상과 목적
포상팔국의 난이 일어난 시기과 목적에 대해서 다양한 학설이 있음은 아래의 표에서 가늠해 보실 수 있습니다.
장혜금(2015) - 사물국의 성립과 변천.
혼란한 기록 양상을 절묘하게 만족시켜줄 이론이 있지 않으므로 각 가설이 설명하는 포상팔국의 난의 양상과 전쟁 목적에 대한 장단점을 간략하게 언급하겠습니다.
3세기 전반설
신라본기 내해이사금의 기년을 그대로 인정하는 입장입니다. 기년수정을 하지 않는 것은 장점이자 단점입니다. 3세기 전반의 요동 공손씨 세력에 의해 성립된 낙랑군/대방군의 세력 조정에 의해서 한반도 남부의 세력 균형이 크게 흔들린 것을 원인으로 보며 동시기 한강유역의 신분고국이 한사군과 충돌하고 몰락한 반면 백제가 두각을 나타나게 된 것처럼 포상팔국의 난과 그 실패로 포상팔국이 몰락하고 김해가 두각을 나타나게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변화는 기존의 사천 늑도 세력이 이 시기에 쇠퇴하고 김해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게 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김해를 구원해야 할 경주의 세력이 고고학적으로 미미할 단계이고, 등장하는 포상팔국의 국명이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등장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물론 기록된 전쟁 양상이 과장되었거나 포상팔국이 아예 몰락해버려 기록 시기에 이미 나라가 사라져버렸을 수는 있습니다.
3세기 후반설~4세기 초반설
기록을 1갑자 혹은 2갑자 내려서 해석하는 입장입니다. 삼국의 초기 기록이 일본서기처럼 연대를 끌어올려 기록되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자연스러우며 보정결과 영남의 고고학적 발전 양상과 맞출 수 있는 것이 장점입니다. 김태식을 비롯하여 꽤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시기이지만 그만큼 전쟁의 목적이나 양상에 대해서 서로 다른 가설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공격받은 국가가 함안의 아라가야인지, 김해의 금관가야인지, 둘 다인지에 대해서 학설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포상팔국 안에 함안이 포함되는지 아닌지 역시 학설이 나뉘는 부분입니다. 전쟁의 촉발 원인은 3세기 전반설과 마찬가지로 한사군의 쇠퇴와 축출에 의해서 교역로가 위협을 받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전쟁이 벌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뒷받침 하는 고고학적 변화는 대형목곽묘의 출현과 토기 기형의 분화입니다. 김해가 공격을 받았다는 학설은 한사군의 몰락으로 교역망이 쇠퇴함에 따라서 교역량이 감소하고 이를 김해가 독점하려 했기 때문에, 혹은 김해가 마찬가지로 쇠퇴했기 때문에, 김해의 교역량을 빼앗아 오고자 등등의 이유로 전쟁이 일어났을 것으로 보며, 함안이 공격을 받았다는 학설은 포상팔국이 더 이상 상업기지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자 농업 중심으로 전환하면서 배후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해, 혹은 다른 교역망인 남강/낙동강 교역망을 확보하기 위해 일어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김해의 발전이 두드러질뿐 다른 지역은 별다른 정치체의 발달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데 금관가야가 신라에 원군을 요청해야 할 정도의 위협이 되고 이후 독자적으로 신라를 공격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가 문제가 됩니다. 물론 3년 후의 3국의 신라 공격을 포상팔국의 난 때 일어난 일을 중복해서 기록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4세기 중반~4세기 후반설
메인 사건은 가야 각국 사이의 전쟁이 아니라 신라를 공격한 것으로 보는 입장입니다. 가야와 신라와의 일대 전쟁이 벌어졌고 이후 광개토대왕의 남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포상팔국의 난 기록에서 여러 국가가 연합했다는 인상 이외에는 문헌 기록을 거의 가져 오지 않는 것이 단점입니다.
5세기 초반~5세기 중반설
신라가 가야 지역에 원군을 파병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성장한 상태이며, 가야의 각국 역시 어느 정도 군사를 동원할 역량이 만들어지는 시점이라 고고학적인 증거는 풍부합니다. 김해의 쇠퇴 양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포상팔국의 공격에 신라의 도움을 바라는 것이 부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그 대상이 함안이나 고령이라 하더라도 아직 발달 초기라 신라에 원군을 요청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신라본기의 기년을 매우 뒤틀어 놓는 해석이므로 나머지 기록들의 재배치나 기년수정, 전승 주체를 논리적으로 해명하기 어렵습니다. 통상적으로 내물왕 아무리 늦어도 지증왕부터는 기년을 긍정하는데 파사이사금을 비롯한 계보와 전승을 어떻게 배치해야 하는지, 그에 대한 논리적인 근거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일관성있는 설명이 필요해 포상팔국의 난을 해석하다가 더 큰 문제를 만드는 격이라 하겠습니다.
6세기설
가야 지역의 대혼란 양상이나 신라의 가야에 대한 우위를 분명히 알 수 있는 기록 형태상 가야 멸망기에 가까운 시점에 일어난 일을 끌어올려 기록했다는 입장입니다. 고고학적으로 소가야의 넓은 영향권과 대비되는 함안, 김해의 제한적인 영향력에서 신라의 구원군을 요청하고 인질을 제공하는 양상이 자연스럽습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울산으로 비정되는 갈화성 공격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소가야 일대에 여러 석곽/석실묘가 조성됩니다. 함안이나 김해가 아니라 백제의 대가야 영역 탈취로 위세가 실추된 고령을 공격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왜 그 사건을 일부러 끌어올려 기록했어야만 하는지, 6세기 신라본기에는 왜 그 기록을 실을 수 없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문헌
권주현(2011), "[삼국사기]에 보이는 4~5세기의 가야와 삼국과의 관계", '신라문화', 38, 53-84.
김태식(2010), "신라와 전기 가야의 관계사", '한국고대사연구', 57, 275-317.
남재우(2008), "칠포국의 성립과 변천", '한국상고사학보', 61, 59-64.
선석열(1997), "포상팔국의 아라국 침입에 대한 고찰 -6세기 중엽 남부가야제국의 동향과 관련하여-", '가라문화', 14, 47-91.
이정아(2011), "포상팔국전쟁의 연구쟁점 고찰",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장혜금(2015), "사물국의 성립과 변천", 창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태경회(2007), "3세기 가야교역체계의 변화와 포상팔국전쟁", 한국교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허재혁(1998), "5세기대 남부가야의 세력재편 : 포상팔국 전쟁과 고구려군 남정을 중심으로", 부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주의. 이 아래부터는 전적으로 글쓴이의 망상입니다.
워낙 기록이 소략하다보니 안그래도 여러 해석과 추정이 난립하는 와중에 아마추어의 특권(?)을 사용하여 저도 메뉴 하나를 만들어 볼까 합니다. 이런 망상도 역사를 즐기는 하나의 방식이 아니겠습니까. ㅎㅎ
저는 개인적으로 포상팔국의 난이라는 사태가 만약 일어났다면 5세기 초반이 알맞지 않나 생각합니다. 대개 포상팔국은 그 이름을 보아 남해안의 각 지역에 비정되는데 기원 전후로 발달한 지역이던 사천 늑도나 창원 다호리가 몰락하고 김해가 대두되는 시기이던 3세기 초반까지는 아직 경주 사로국이 김해를 돕거나 할 역량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3~4세기 동안은 김해가 나머지 경남 지역에서 독보적인 국가였다는 것은 분명한데 김해를 흔들 정도의 역량을 가진 포상팔국 관련 지역이 별다른 유물/유적을 남기지 못하는 상태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떡밥계의 복어회, 복어지리라고 불리는 일본서기를 좀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열도는 오랜기간 가야지역과의 교류와 왕래가 있었음을 문헌이나 고고학자료를 통해 널리 인정되고 있습니다. 만약 가야 지역에 그러한 대혼란이 있었으면 일본서기에 그와 관련한 잔상이 남아 있을 법하다고 생각합니다. 숭신천황부터 임나와 계림이 나오는 형편이니까요. 신라 전승과 교차검증이 가능한 석우로가 포상팔국의 난에 활약한 인물이니 그 즈음의 한반도 상황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임나와 신라를 흔든 일을 일본서기가 가져가 쓸 법도 한데 그에 딱 걸맞는 기록은 없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신공황후 대의 습진언/사지비궤 전승이 포상팔국의 난과 연결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62년 신라가 조공하지 않았다. 이 해에 습진언(襲津彦)을 보내어 신라를 쳤다『백제기』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임오년에 신라가 귀국을 받들지 않았으므로 귀국이 사지비궤(沙至比跪)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는데, 신라인은 미녀 두 사람을 단장시켜 나루에서 맞아 유혹하게 하였다. 사지비궤는 그 미녀를 받아 들이고 오히려 가라(加羅)국을 쳤다. 가라국왕 기본한기(己本旱岐)와 아들 백구지(百久至)·아수지(阿首至)·국사리(國沙利)·이라마주(伊羅麻酒)·이문지(爾汶至) 등이 그 인민을 데리고 백제로 도망하여 오니 백제는 후대하였다. 가라국왕의 누이 기전지(旣殿至)가 대왜로 가서 “천황이 사지비궤를 보내어 신라를 토벌하게 했는데 신라 미녀를 받아 들이고 (왕명을) 저버리고 토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우리나라를 멸망시켜 형제와 인민들이 모두 유리하게 되어 걱정하는 마음을 이길 수 없으므로 와서 아룁니다”라 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목라근자(木羅斤資)를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가라에 모여 그 사직을 복구시켰다고 한다. 일설은 다음과 같다. 사지비궤가 천황이 노한 것을 알고 몰래 돌아와 스스로 숨어 있었다. 그 누이가 황궁에서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비궤가 몰래 사람을 보내어 천황의 노여움이 풀릴지 어떨지를 물어 보았다. 누이는 꿈에 가탁하여 “오늘 밤 꿈에 사지비궤를 보았습니다”라 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비궤가 어찌 감히 오느냐”라고 하였다. 누이가 천황의 말을 전하였더니 비궤는 면할 수 없음을 알고 바위굴에 들어가서 죽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신라의 계략으로 가라를 치게 되었다고 하지만 왜군의 상륙지점(혹은 도하지점)에 미녀를 대령해 놓았다는 내용을 그대로 취신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정말로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작전 계획이 노출되어 상륙지점(도하지점)이 신라의 감시하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전략을 바꾸어 가라를 치게 되는 것은 단순 약탈 행렬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만 가라와 신라 사이의 모종의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공격방향을 신라가 아니라 가라로 향했을 것입니다. 이는 포상팔국의 난 직전에 가라와 신라 사이의 화친이 이루어진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통상적으로 신공황후의 기록은 이주갑인상된 것으로 파악하기에 382년으로 봐야하는 것이 아닌가 할 수 있지만 일본서기의 기년 혼란 양상을 보았을 때 모든 기록을 일괄적으로 120년 인하로 파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신공황후의 기록대로 한다면 파사이사금이 미사흔을 볼모로 보내고 미사흔의 탈출이 근초고왕대 보다 앞서서 이루어진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공황후 49년에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대에 일어난 일임을 명시하고 있으나 가라와 남가라를 구별하는 후대의 관념이 투영되어 있음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심각한 경우 구절별로 연대가 다른 시기의 내용이 섞여 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일본서기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기록 역시 비슷한 방식의 조정(?)이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다분히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제 입맛에 맞는 기록을 가져와서 얼기설기 엮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마추어의 실력으로 복어회를 뜨려니 만만치 않네요.
참고문헌
백승충(2015), "[일본서기] 목씨·기씨 기사의 기초적 검토 : 신공~현종기를 중심으로", '한국민족문화', 54, 57-101.
이근우(2005), "[일본서기][신공기]가라 7국 정벌 기사에 대한 기초적 검토", '한국고대사연구', 39, 113-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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