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에도 관심을 - 가야연구 맛보기 (8) : 구야국의 리즈시절
구야국의 성장과 확장
최초 김해의 우세 집단은 양동리 고분군을 묘역으로 사용하였으나 3세기 중후반에 들어 그 중심 묘역이 대성동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대성동 고분을 구야국을 시초로 보는 견해도 있고, 김수로왕의 비정상적인 재위기간을 수로집단의 역사로 치환하여 양동리 고분군을 수로 집단의 역사, 그 이후를 실질적인 구야국의 역사로 생각하는 견해도 있습니다만 설화적인 성격이 매우 강한 관계로 실제적인 역사를 복원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1)
구야국의 성장은 점점 커지는 대성동 목곽묘의 크기와 그 부장품의 수량과 질을 통해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토기의 다량 부장과 당시에는 쉽사리 구할 수 없었던 유리 제품의 부장이 이루어지며 이 부장품을 위해서 곽 내부에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게 되는데 이것이 김해식 목곽묘로 불리는 주-부곽식 일자형 목곽묘입니다. 주곽과 나란히 별도로 만들어진 부곽에 부장품을 채워넣어도 될만큼 김해지역의 위세가 컸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또한 순장제도도 시작되어 주, 부곽에 함께 매장되는데 이런 인력의 낭비가 아무렇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2)
구야국의 영역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외절구연고배와 통형동기입니다. 물론 매장 유물로 세력권을 파악하는 것은 웬만해서는 해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외절구연고배는 특이하게 김해 주변 지역에서만 국소적으로 출토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세력권과 연결시킬 수 있지 않을까하는 일련의 연구진들이 있습니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구야국의 영역은 서쪽으로는 옛 창원에서 동쪽으로는 부산에 이르게 됩니다. 반대로 외절구연고배의 출토는 단순 교역의 결과라는 연구진들도 많습니다. 이렇게 대립하는 이유는 4세기 경 부산이 어느 세력권에 귀속되었는지에 대한 문제로 연결됩니다.
부산은 가야권인가 신라권인가
부산은 거리상으로는 김해와 가깝지만 낙동강을 건너야하는 김해와는 달리 경주-울산과는 육지로 이어져 있습니다. 지금에서야 김해에서 부산을 연결하는 고속도로와 국도가 여럿 있어 김해와 부산을 연결시켜주고 있지만, 가야가 있을 시절에는 김해평야는 온통 바다였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지금보다는 멀게 느껴졌을 겁니다.
이 시기에 부산에서는 노포동 고분군과 복천동 고분군이 조성되는데, 아무래도 구야국과 사로국에서 동시에 영향을 받을만한 입지 조건이라 3세기 말 이후로 김해권 유물과 경주-울산권 유물이 함께 나타나게 됩니다. 하지만 4세기 중엽 이후로는 전적으로 김해권 유물들이 출토되는데, 외절구연고배와 통형동기와 함께 김해식 주-부곽식 일자형 목곽묘도 들어오게 됩니다.(4) 이렇게 고고학적 지표는 4세기 가야가 부산에 세력을 확장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으나, 문헌사학자들은 동래로 비정되는 거칠산국을 신라가 점령했다는 기사를 들어 (거도열전) 이미 부산은 신라의 영역이었으며 부장되는 가야유물은 교역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견해를 수용한다면 세력균형은 이미 사로국에 매우 기울어져 있는 형국이라 왜-가야 연합군이 사로국을 위협하고, 이에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는 것 자체를 납득하기 어렵게 됩니다. 또한 왜-가야 연합군의 중심추도 왜가 될 수밖에 없지요. (이...임나일본부?)
이와는 별도로 부산이 김해나 경주와는 별도의 정치체를 유지하고 4세기 대에는 가야와, 5세기 대에는 신라와 연합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만(5) 신라가 가야를 복속해 나가는 과정을 신라 유물이 기존의 지역 특이적인 유물을 밀어내고 우세해지는 시점으로 잡는다면 이미 5세기 초에 그러한 현상이 발생하고, 명백히 부산보다 김해나 경주가 우위에 있는 집단이 분명하기에 동등한 수준에서 연합이나 동맹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또다른 쟁점은 완전히 구야국 세력권에 편입되기 이전에는 어느정도 경주-울산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에 부산이 진한권인가 변한권인가 하는 문제가 다시 불거져 나올 수 있습니다. 창녕으로 비정되는 진한 불사국이 이후 비자벌가야(비화가야)가 된 것처럼 부산 역시 진한 세력권이었다가 구야국의 팽창으로 가야권에 편입되었고 이후 고구려에 의해 신라에 복속되는 과정을 그릴 수도 있을 것인데, 만일 그렇다면 부산은 변한 독로국이 될 수 없는 겁니다.
왜와 긴밀하게 연결된 구야국
김해는 위치상으로 일본과 가깝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왜와 교역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해주듯이 김해와 부산에는 왜계 토기인 하지키계 토기가 다수 발견됩니다. 왜계 토기는 부장품으로도 발견될 뿐만 아니라 생활 유적지에서도 발견되며 실제 음식을 조리한 흔적이 남아 있는 유물이 많습니다. 이에 왜인들이 구야국에 다수 건너와 살았거나, 구야국 사람들이 왜계 토기를 수입해 실생활에 사용했음을 의미합니다.(made in japan을 선호하는 구야국 사람들 or 외국인 노동자 or 이... 임나일본부!?)
왜의 것이 한반도로 넘어오는만큼 한반도의 것이 왜로 많이 건너가게 되었을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키 토기 다음에 나타나는 스에키 토기는 김해토기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기존에는 고구려의 원정 이후 구야국에서 왜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해 스에키 토기 문화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4세기 말에 제작된 스에키 토기가 발견되어 고구려 원정과는 별개의 역사임이 드러났습니다.(7) 구야국과 왜의 빈번한 교류와 교역의 결과물로 생각되며 이러한 교류가 사로국 침공을 위한 왜-가야 연합군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입니다.
1. 백승충, "1~3세기 가야세력의 성격과 그 추이", 1989, 석사학위논문.
2. 김세기, "가야지역 고분자료와 묘제의 지역성 고찰", '영남학', 2008, pp165-210.
3. 최병현, "신라 전기양식토기의 성립", '고고학', 2013, pp5-58.
4. 김태식, "신라와 전기 가야의 관계사", '한국고대사연구', 2010, pp275-317.
5. 김두철, "부산지역 고분문화의 추이 -가야에서 신라로-", '항도부산', 2003, pp245-295.
6. 홍보식, "한반도 남부지역의 왜계 요소 : 기원후 3~6세기대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 2006, pp21-58.
7. 박광춘, "일본 초현기 수혜기의 시원과 생산 배경", '호남고고학보', 2012, pp4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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