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016의 게시물 표시

가야에도 관심을 - 가야연구 맛보기 (18) : 포상팔국의 난 (2) - 시기의 문제

  포상팔국의 난이 삼국사기 대로  3 세기 초가 아니라면 어느 시기로 비정할수 있을까요 ? ( 물론  3 세기 초 기년을 그대로 인정하시는분들도 꽤 많습니다 .)  이에 대해서 크게 김해세력이 성장하기 이전에 포상팔국의 난이 일어났다고 여기고 포상팔국의 난 결과 김해가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고 생각하는 측과 김해가 몰락했기 때문에 포상팔국의 난이 일어났고 이를 신라가 구원하고 이에 대해 가야가 인질을 보내면서 영남권에서 신라의 우위가 결정적으로 드러났다는 입장이 있습니다 .  물론 이 분류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요 .   삼국사기 기년을 마음대로 갖다 붙일 수는 없으므로 각 연구자들이 나름의 수정 기준을 가지고 연대를 조정하게 되는데 ,  대체로 현재까지 밝혀진 고고학자료를 활용하거나 삼국사기 내의 계보도를 신뢰하였을 때 세대 차이를 약  25~30 년으로 생각하고 재조정한 후 그 연대를 사용하는 경우로 나눌 수 있습니다 .  이에  3 세기 후반 /4 세기초 발발설은 그 시기에 등장하는 고고학적인 변화 - 고식도질토기의 출현과 대형목곽묘의 등장 - 가 포상팔국 전쟁과 연결고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1-3)  이는 내해이사금조의 기사를 이주갑 인하하는 것에 대응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  즉 ,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포상팔국의 난 결과 기존의 남해안 지역 군소 국가들이 몰락하여 김해가 변한 지역에서 독보적인 정치체로 성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반면  5 세기 이후 발발설은  3 세기중반 위지 동이전에서 김해가 다른 지역에 비해 대국임을 알 수 있고  3-4 세기에는 비약적으로 발전해 압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으며 ,  고고학적으로 꾸준히 발전하고 있었음을 지적합니다 .  특히 삼국유사에서는 일차적으로 포상팔국이 패퇴한 다음  3 국이 다시금 신라를 공격하고...

가야에도 관심을 - 가야연구 맛보기 (17) : 포상팔국의 난 (1) - 기록의 문제

  아시다시피 가야 각국은 스스로 제작한 기록물을 후대에 남기지 못했습니다 .  기록물이 있었으나 유실되어 버린 것인지 원래부터 기록물을 만들지 못한 것인지는 지금으로써는 알 수 없습니다 .  기원전  1 세기경에 이미 가야지역에 기록과 관련 있을 붓과 삭도 ( 지우개 ) 가 전래되었고 ,  오랜 기간 중국 군현과 교류한 것을 볼 때 문자를 아는 식자층이 있었을 법 하긴 합니다만 그저 아쉬울 뿐이지요 .   삼국유사에 가락국기의 내용을 전하고 있으나 김해의 수로왕에 대한 전승 이외에는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시피 하고 원전이 되는 가락국기의 편찬시기 역시 가야 멸망 이후 매우 늦은 시기에 정립되어 있어 그야말로 전승 이외의 의미는 없다고 보입니다 .  그렇다면 믿을 구석은 단편적으로 널려 있는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가야에 대한 기록 밖에 없습니다 .   가야 각국이 현재의 경남 서부에서 전남 동부에 이르는 지역을 점유하고 있었습니다만 ,  백제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백제본기는 아무런 이야기를 해 주지 않습니다 .  이는 백제본기 자체의 기록이 부실하기 때문일 수도 ,  혹은 원래부터 가야에 대한 기록이나 전승이 빈약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백제본기의 서술에서는 영토 확장 기사에서 독립된 정치체의 국가를 정벌한 것이 아니라 지역 ,  촌락을 복속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맥락에서 국가명이 일괄적으로 누락되었을 수 있겠지요 .  이와 달리 신라본기에서는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까지 지역 국가 명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   신라본기는 가야에 대한 몇 가지 전승을 기록하고 있는데 ,  탈해이사금과 김해와의 인연 ,  파사이사금 대의 실직곡국과 음즙벌국 전승 및 가야와의 분쟁 ,  그리고 내해이사금 대의 포상팔국 전쟁입니다 . 14 년 가을  7 월에 포상 ( 浦上 ) 의 여덟 나라가 가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