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에도 관심을 - 가야연구 맛보기 (18) : 포상팔국의 난 (2) - 시기의 문제
포상팔국의 난이 삼국사기 대로 3 세기 초가 아니라면 어느 시기로 비정할수 있을까요 ? ( 물론 3 세기 초 기년을 그대로 인정하시는분들도 꽤 많습니다 .) 이에 대해서 크게 김해세력이 성장하기 이전에 포상팔국의 난이 일어났다고 여기고 포상팔국의 난 결과 김해가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고 생각하는 측과 김해가 몰락했기 때문에 포상팔국의 난이 일어났고 이를 신라가 구원하고 이에 대해 가야가 인질을 보내면서 영남권에서 신라의 우위가 결정적으로 드러났다는 입장이 있습니다 . 물론 이 분류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요 . 삼국사기 기년을 마음대로 갖다 붙일 수는 없으므로 각 연구자들이 나름의 수정 기준을 가지고 연대를 조정하게 되는데 , 대체로 현재까지 밝혀진 고고학자료를 활용하거나 삼국사기 내의 계보도를 신뢰하였을 때 세대 차이를 약 25~30 년으로 생각하고 재조정한 후 그 연대를 사용하는 경우로 나눌 수 있습니다 . 이에 3 세기 후반 /4 세기초 발발설은 그 시기에 등장하는 고고학적인 변화 - 고식도질토기의 출현과 대형목곽묘의 등장 - 가 포상팔국 전쟁과 연결고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1-3) 이는 내해이사금조의 기사를 이주갑 인하하는 것에 대응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 즉 ,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포상팔국의 난 결과 기존의 남해안 지역 군소 국가들이 몰락하여 김해가 변한 지역에서 독보적인 정치체로 성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반면 5 세기 이후 발발설은 3 세기중반 위지 동이전에서 김해가 다른 지역에 비해 대국임을 알 수 있고 3-4 세기에는 비약적으로 발전해 압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으며 , 고고학적으로 꾸준히 발전하고 있었음을 지적합니다 . 특히 삼국유사에서는 일차적으로 포상팔국이 패퇴한 다음 3 국이 다시금 신라를 공격하고...